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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과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by 달리아

오늘 오전에 지인과 통화를 하다가, 질문을 받았다.


"예전에 많이 우울해서 잠만 잘 때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질문을 받고선, 나의 일상을 돌아보니, 최근엔 그렇게 우울하거나 일어나지 못할 만큼 힘든 때가 없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울이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정혜신 박사님의 말처럼 우울은 '삶의 보편적 바탕색'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전화를 끊고서는, 2년 전 겨울, 우울이 무겁게 찾아왔던 때가 떠올라, 그때 썼던 글을 다시금 읽어본다.




반복되는 낮과 밤처럼, 내 삶에도 기쁨과 우울이 번갈아 찾아왔다. 몸과 마음에 남겨졌던 상처와 아픔의 흔적은 때로는 나를 깊은 우울과 좌절의 수렁에 밀어 넣었다. 최근에 빠졌던 수렁은 꽤 깊고, 또 어두웠다. 현실에서 여러 일들을 진행해 가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나는 두려움에 갇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신기하게도, 그즈음에, 두 아이들이 이런 엄마의 상태를 안다는 듯 내 곁을 맴돌며 아래의 구절을 몇 번이고 말했다.

"우아우아 아이가 얼음산에 오르다 구덩이에 빠졌네. 더 더 들어가 황금공을 찾아서 나타났다네"



아이들이 메아리처럼 전해준 메시지 속에는 마치 구전처럼 전해진 이야기 같은 지혜가 들어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내가 빠진 구덩이 안의 어둠과 그림자를 더 선명하게 바라보기로 했다. 그래야만 황금공을 찾아 다시 수면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더 가라앉지 않기 위해 신뢰하는 친구들의 도움과 연대를 요청하고, 내면아이와 신체 기반 상담을 받기로 했다.




짙은 어둠 속 추운 방에는 홀로 갇혀 죽은 듯이 무기력하게 누워있던 아이가 있었다. 온몸이 상처와 피투성이었지만, 살려달라고, 구해달라고 소리치지도 못하고, 마치 뇌성마비 환자처럼 넋을 놓고, 고통을 최소로 느끼기 위해 감각을 마비시킨 체 웅크리고 있는 나의 부분이었다.


소화되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내 몸과 마음에도 영향을 주어, 한동안 왼쪽 어깨와 가슴과 팔이 마비된 듯 무감각해지고 무겁게 느껴졌다.


"몸의 마비된 부분, 아프고, 어두운 부분이 어떻게 되면 좋겠어요?"


신체 기반 상담을 하시는 상담사 선생님이 질문했다.


순간적으로,


"이 부분만 도려내고, 없애 버리면 좋겠어요."


라는 의외의 답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자꾸만 나와 내 인생을 가로막고, 힘들고, 무겁고, 우울하게 하는 기억으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 부분에 대해 진심(화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시군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그 일만 아니었어도, 그 고통만 아니었어도, 나는 지금보다 훨씬 멀리, 높이 나아가, 더 멋진 사람이 되었을 텐데...'


라는 원망과 분노와 절망의 목소리와 감정들이 함께 느껴졌다.


"네가 잘못해서 그런 거야. 네 탓이야. 네가 부족하고 이상하고 못나서 그런 거야.
넌 그렇게 당해도, 죽어도 싸"


뒤이어, 끔찍한 비난의 목소리들이 뒤따라 소리를 높였다.


나를 함부로 대하고, 아프게 하고, 파괴했던 이들의 눈빛과 말들과 태도와 행동들은 무의식 중에 내 안에 스며들어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나가 내 스스로를 얼마나 잔인하게 대할 수 있는지를 자각할 수 있었다. 나를 채찍질하고 파괴하는 사탄마귀나 마라는 결국 내 안에 있었다.




나는 상담을 마치고, 며칠간 명상과 기도를 이어가며, 왼쪽 몸의 감각과 느낌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다 문득,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내가 분노를 하며 맞서 싸워 없애고자 했던 나의 그림자, 고통, 어둠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연민의 마음이 솟아났다.


'그동안 얼마나 아팠니, 얼마나 외로웠니, 얼마나 힘들고 무거웠니?'


아파서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주는 엄마의 목소리와 품과 같은 마음에 안겨서, 나는 울고 또 울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작고 나약한 존재를 수없이 안고 돌보고 달랬던 손길과 마음이 나를 토닥여주었다. 막혀 있던 몸과 마음의 부분들이 풀어지고,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내면 아이 작업을 하며 그린 그림 @달리아

내가 나약하다 느끼고, 외면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도움의 요청이었고 절규였음을 깨닫자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와 자세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제 더 이상 나를 내팽개치거나, 비난하거나, 탓하지 않겠다고, 어떤 경우에도 나를 지키고, 돌보고, 사랑하겠다고 말하며, 나는 내 안의 어둠과 그림자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꼭 안았다.




이러한 경험을 하고 나서, 며칠 뒤, 나는 당시 매일 만나던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과 자기 공감에 대한 수업을 진행했다. 최근 자신이 실수하거나 잘못했을 때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탓하지 않고, 그런 자신을 위로하고 돌보는 것을 함께 연습해 보았다.


그중 한 아이가 수업 후 나누기 시간에,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본 감정이라고 해서 비유 등으로 설명해 보라고 했더니,


'열쇠가 없이 갇혀있던 방의 벽을 뚫고 나온 느낌이에요'


라고 표현했다.


내가 온몸으로 경험했던 것이 10살 아이에게도 전해지는 것이 신기했고, 결국 내가 느끼고 경험한 것만큼만 전할 수 있다는 것이 다시금 와닿았다. 나의 치유와 성장이 다른 존재들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도 느꼈다.


우리가 태어나서 몸과 마음의 아픔을 겪는 것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를 통해 다른 존재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를 치유하고 성장하며 서로 더 깊이 연결되기 위함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처럼 나는 우울이 찾아올 때마다 그 여정을 기록해 왔고, 그 기록들은 나이테처럼 내 삶에 새겨져 왔다. 그 지난한 과정들을 통해 나는 조금씩 우울과 고통을, 그리고 그 속에 빠져있는 대하는 태도를 배워오고 있다. 때때로 나아지려는 욕심조차 내려놓고, 가만히 그 시간을 견뎌야 하는 때도 있고, 완전한 어둠의 시간을 오롯이 품어야 할 때도 있다.

예전에는 밤과 어둠이 길어지는 겨울을 피하고만 싶었지만, 이제는 어둠을 품는 달처럼, 그 시간을 안아가고 싶다. 가장 어두운 순간들조차 내 삶과 존재의 일부이기에, 이 반복되는 빛과 어둠이 나를 빚어줌을 알기에, 나는 오랜 시간 가슴에 품은 시 한 편을 꺼내어 읊조린다. 이 글과 시가 어둠과 우울과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누군가의 가슴에도 닿길 바라며.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어둠이 없으면 어떤 것도 탄생하지 않고
빛이 없으면 어떤 것도 꽃 피지 않음을 아는
희망을 품은 영혼의 정원사가 되게 하소서

메이 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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