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과 초겨울의 산책을 좋아한다. 차갑고도 맑아진 공기에 정신이 깨어나는 기분과 폭신하게 쌓인 낙엽길을 밟는 느낌, 얇은 나뭇가지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던 도토리나 은행 같은 나무 열매들이 땅에 무심한 듯,
툭,
툭,
떨어지는 소리들을 좋아한다.
그중에서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풍경은 까치밥이라고도 불리는 주황이나 붉은빛의 열매들이 달려있는 모습이다.
먹이가 줄어드는 계절에 배고픈 새들이나 곤충들이 와서 열매를 파먹기도 하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엔 그 안에 씨앗들을 가득 품고선 땅으로 내려앉는다. 한껏 무르익은 열매들이 떨어질 때는 딱딱한 껍질에 둘러싸인 열매들의 하강 때와는 다르게
"철퍼덕"
하는 소리가 난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 등을 쓴 교육지도자인 파커 파머는 삶을 계절로 비유하는 것을 즐겨하며 '계절의 비유는 우리가 세상의 법칙의 본질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며, '우리의 인생이 끝없는 계절의 순환과 같다는 개념은 투쟁과 기쁨, 손실과 이득, 어둠과 빛을 부정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 모든 것을 포용하도록 그리고 그 안에서 성장의 기회를 발견하도록' 해준다고 했다.
파커 파머의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라 책은 대학생부터 지금까지 여러 번 곁에 두고 읽는 책인데, 이 책에서 파머는 계절에 삶을 비유하는 통찰하는 챕터를 봄이 아닌, 가을로 시작한다. 파머는 가을을 '참 자아의 씨앗'의 계절이라고 비유하며, 열매가 품고 있는 씨앗이 가을에 다시 땅으로 돌아가서 겨울을 혹독함을 지나 봄의 화려함을 거쳐 여름의 풍요로움으로 흐르고 이것이 끝없이 순환함을 보여준다.
최근에 읽은 최재천 교수님의 <손잡지 않고 살아남는 생명은 없다> 책에서는 한 개체로서의 생명은 한계성을 가지지만, 유전되는 DNA 차원에서 보면 생명의 영속성을 볼 수 있다는 개념도 이러한 사유와 통해있다. 이러한 글들의 의미를 깊이 음미할 때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이 세상에 남기고, 또 전하고 있는지를 더 깊이, 더 자주 들여다보게 된다.
요즘엔 대학생 때 뵈었던 한 어르신께서,
"한 사람의 삶이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 배고픈 존재에게 밥이 되거나 씨앗을 퍼트리는 열매처럼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나눌 수 있다."
라고 하셨던 말씀이 유난히 많이 생각난다.
나무의 양분과 햇빛, 비바람, 천둥 등을 모두 받아들이며 한껏 무르익은 열매를 올려다보며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에 가장 가까운 빛깔과 형태가 있다면 바로 이 모습이 아닐까... 하며, 이처럼 사랑으로 익어가는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또 한 번, 마음에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