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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Mar 29. 2016

화요일의 디제이

몰라줘도 서운하지 않은 그날의 방송

대학교 때, 나의 아침은 조금 특별했다.


아침 6시면 일어나 내 방 창문을 열고 푸르스름 밝아오는 하늘을 구경했다. 그리고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모든 수업은 9시부터 시작. 나는 1교시 수업이 있는 것도 아닌데, 7시 반이면 학교에 도착했다.


우리 학교는 담장도, 정문도 없었다. 캠퍼스도 고등학교처럼 작았다. 지나가는 사람이 본다면 동네 공원 같은 생김새의 대학교였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얕은 오르막길을 올라 학교 입구에 들어서면, 캠퍼스 한가운데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느티나무를 둘러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맞은 편엔 나무판자를 덧대어 만든 벤치들이 놓여 있었다.


전교 일등으로 등교한 것 같은 뿌듯한 기분을 만끽하며, 나는 자판기 커피를 뽑았다. 그리고 벤치 위에 두 다리를 끌어안고 앉아선, 홀짝홀짝 커피를 마셨다. 코끝에 달달한 커피 냄새가 맴돌고 손바닥에 따뜻한 기운이 퍼지면, 나는 천천히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시야에 모두 들어올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예뻤다. 직선으로 뻗은 철골 구조물, 깨끗한 회색 건물 벽, 그 위를 타고 오르는 담쟁이들, 둘 셋으로 나뉘는 여러갈래 보도블록 길, 소담한 꽃과 나무들이 피어있는 화단, 그리고 반짝이는 것들마다 반사되어 눈부신 아침 햇살. 발그레 두 뺨을 스치는 샛파랑 아침 공기가 개운했다.


이른 아침의 조용한 학교.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은 말간 캠퍼스의 얼굴이 좋았다. 한 모금씩만 커피를 아껴 마시며, 나는 캠퍼스로 걸어오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가장 먼저 나온 사람들은 경비 아저씨들이었다. 남색 모자를 눌러 쓴 아저씨들은 기다란 대빗자루를 들고나와서 바닥을 쓸었다. 누군가 버린 쓰레기를 줍고, 담배꽁초와 낙엽 따위를 자루에 쓸어담았다. 늦가을이 되면 노란 자루가 빵빵하게 차올랐다.  


이어서 파란 옷을 입은 청소 아주머니들이 캠퍼스로 나왔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걸레로 벤치 위를 닦았다. 그리곤 건물로 들어가 정수기 물컵을 갈고, 바닥을 닦고, 화장실 청소를 시작하셨다.


경비 아저씨들이 잠겼던 건물 문을 열면, 그곳에서 학생들이 나왔다. 밤새 지하 열람실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하품을 하며 걸어왔다. 피곤한 얼굴들 몇몇은 커피를 마시고, 몇몇은 담배를 태웠다. 나누는 대화 소리가 짹짹이는 새소리보다도 조용했다. 퀭한 눈을 끔벅거리며 활짝 기지개를 켜곤, 학생들은 다시 지하 열람실로 내려갔다.


그때쯤, 과방에서 밤새워 마신 학생들도 학관을 걸어 나왔다. 앳된 얼굴들이 아직도 발그레 취해있었다. 까치집 머리를 긁적이며 학교를 빠져나갔다.


나는 다 마신 종이컵을 입에 물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8시 20분. 그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나도 캠퍼스를 걸었다. 담쟁이 핀 벽을 스쳐 지나가면서 아저씨, 아주머니들과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응. 방송하러 가?”


“네. 듣고 싶은 노래 있으세요?”

“난 예스터데이가 좋던데.”


“네. 그 노래 틀어드릴게요.”

“고마워. 고생해.”


나는 캠퍼스 구석에 위치한 건물에 들어섰다. 막 문을 연 복사점 아저씨 내외와 인사를 나누고, 코너를 돌아 ‘방송국’이라는 팻말이 적힌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열악한 녹음 부스, 냉장고처럼 커다란 음향 기계와 낡은 콘솔이 전부였지만 나름 멋진 우리의 방송국이었다.



나는 교내 방송국 피디였다. 우리는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세 번 오디오 방송을 했다. 8시 30분부터 9시까지는 아침방송 시간, 매일 아침마다 부원들과 번갈아가며 디제이가 되어 아침방송을 진행했다.


아침방송은 가장 쉬운 방송이었다. 큰 기술도 필요 없었다. 녹음해둔 아나운서 오프닝 멘트와 선곡한 음악들을 이어서 재생하는 게 전부였다. 그때는 자유롭게 컴퓨터 음원을 틀 수 있는 스마트한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방송국 벽면에 가득 차 있는 CD들 중 하나를 골라 재생했다.


나는 전날 미리 골라둔 CD 여댓장을 데스크에 올려두고선 방송을 시작했다. 딸깍, 플라스틱 CD 케이스를 열면 머리가 풍성한 외국인들이 기타를 메거나 선글라스를 쓰고 웃고 있었다. 대부분 올드팝이었다. 비틀스나 아바, 스티비 원더, 사이먼 앤 가펑클, 배트 미들러와 같은 옛날 팝가수들의 노래. 선곡이 올드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사실 아침방송을 듣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1교시 수업이 시작될 즈음에야 캠퍼스는 하나둘 학생들로 붐볐지만, 지각을 피하거나 서둘러 수업에 들어가야 해서 아침방송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주 청취자는 경비 아저씨와 청소 아주머니, 복사점 아저씨 내외였다. 오늘 하루 시끌벅적해질 캠퍼스를 위해, 일찍이 학교를 깨우시는 분들에게 들려드리는 특별한 방송이랄까. 아침방송 때문에 방송부원들은 일찍 학교에 와야 했지만,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마다 좋아하는 노래를 선곡해 재생하고 캠퍼스를 깨우는 일을 함께 했다.


나는 아까 경비 아저씨가 듣고 싶다고 했던 예스터데이를 가장 먼저 재생했다. 아저씨의 예스터데이는 비틀스의 ‘Yesterday’가 아니었다. 카펜터스의 ‘Yesterday Once More’였다. 내 아침방송에서는 카펜터스(The Carpenters)가 가장 인기 많았다. Yesterday Once More, Close To You, Top Of The World.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좋아하는 노래들이었다.



캠퍼스의 아침.

스피커 너머로 카펜터스의 ‘Yesterday Once More’가 울려퍼졌다. 나는 철제 의자에 기대어 두 눈을 감았다. 캠퍼스 곳곳의 모습들이 멜로디를 따라 펼쳐졌다. 바닥을 쓸고 있을 경비 아저씨는 빙그레 미소 지을 것이다. 기분 좋은 날에는 휘파람을 불며 따라 부르실지도 모르겠다. 청소 아주머니의 걸레질은 샬랄라라 가볍고, 복사점 아저씨의 복사기는 워우워오 돌아가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아침방송이 좋았다. 작은 캠퍼스에 울려 퍼지는 방송이라도 좋았다. 청취자가 열 손가락에 꼽아도 좋았다.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고, 딱히 몰라줘도 서운하지 않은 일이었다. 경비 아저씨가 그랬고, 청소 아주머니가 그랬고, 복사점 아저씨 내외가 그랬듯이. 덕분에 나의 아침은, 그리고 모두의 아침은 조금 특별했다. 나는 그렇게 2년 동안 아침방송을 했다.


방송국에서 일하던 2년 동안, 내 방송이 아니어도 나는 일찍 학교에 나와 아침방송을 들었다. 노래가 울려 퍼지는 캠퍼스 벤치에 앉아서 아침을 여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아침이 밝아오는 캠퍼스의 사계절을 지켜봤다. 아무도 몰라줘도 서운하지 않은 날들이었다. 키다리 스피커 너머로 흘러나오던 노래들은 그때의 계절과 날씨와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다시 나를 찾아오곤 한다.


지금도 카펜터스의 노래 ‘Yesterday Once More’를 들으면,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던 경비 아저씨가 떠오른다. 그럼 아침 공기가 두 뺨을 스치고, 자판기 커피 냄새가 코끝을 맴돈다. 모두가 부지런했던 그날의 아침을 떠올리며. 샬랄라라 그리고 워우워오 행복해진다.


정말 좋은 아침이었다.



When I was young I'd listen to the radio Waitin' for my favorite songs

When they played I'd sing along It made me smile

Those were such happy times


난 어렸을 때,

라디오에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길 기다렸어요.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면서 미소 지었지요.

정말 행복한 시간들이었어요.


- The Carpenters, ‘Yesterday Onc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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