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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pr 19. 2016

화요일의 젠틀맨

우리 아파트를 지키는 젠틀맨

우리 아파트 경비 아저씨들은 연세가 좀 많으신 편이다. 경비 아저씨가 아니라, 경비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것만 같다. 그중에서도 내가 ‘호호 할아버지 경비 아저씨’라고 특별하고도 거창하게 부르는 분이 계시는데, 어림짐작으로 보아도 일흔 중반은 훌쩍 넘으셨을 것 같다.


호호 할아버지 경비 아저씨.

경비복이 헐렁할 정도로 작고 동그란 체구의 할아버지는, 작은 모자를 머리 위에 살짝 걸쳐 쓰시곤 구부러진 등으로 사부작사부작 아파트 일대를 걸어 다니신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면, 동그란 눈을 깜박이며 ‘네네’하고 자글자글 웃으신다. 한참이나 어린 내게 ‘OOO호 사모님’이라고 불러주시는 목소리가 다정하다. 물론, 귀가 먹먹하셔서 택배를 찾을 때마다 큰소리로 말씀을 드려야 하지만, 굳이 불편한 걸 꼽자면 그뿐이다.


나는 할아버지가 경비실에서 가만히 앉아만 계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할아버지는 아파트 주변을 쓸고 닦고, 쓰레기를 줍고, 음식물 쓰레기통을 청소하시고, 재활용품 분리수거를 하시고, 방문 차량을 관리하시고, 택배를 전달하시고, 주차장 시설을 점검하시고, 아파트 일대를 순찰하시고, 그리고 비가 오면 현관과 엘리베이터 입구마다 레인 매트를 깔아 두신다.


제법 일이 많은데도 싱글벙글 해내시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밥은 잘 챙겨 드시나 궁금해하곤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나는 할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한 가지 더 발견했다.


어스름한 저녁이었다. 택시 한 대가 우리 집 라인 현관문을 완전히 가로막고 서 있었다. 게다가 택시기사는 트렁크에서 짐을 한가득 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현관 앞에다가.


마침 나는 장을 보고 온 터라 양손이 무거웠고, 조금 짜증이 났다. ‘하필 사람들 오가는 현관 앞에 쌓아둘 게 뭐람.’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그때, 경비 할아버지가 달려왔다. 택시 기사에게 주의를 주려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현관 앞에 쌓인 짐을 다시 엘리베이터 앞으로 옮기시는 게 아닌가.


“죄송합니다.”


내게 사과하시더니, 재빠르게 짐들을 옮기셨다. 박스와 봉지들로 보아 대형마트에서 장을 봐온 물건들인 것 같았다. 곧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경비 할아버지는 겸연쩍게 허허 웃으시며,  


“죄송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내게 다시 한 번 사과하셨다. 그리곤 날쌘 동작으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짐을 옮기셨다. 나는 굳은 얼굴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채 기다렸다. 누가 이렇게 많은 물건을 산 걸까? 왜 두 분이 짐을 옮기시는 거지? 의아했다. 그런데 누군가 택시기사의 부축을 받으며 택시에서 내렸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셨다.


“죄송합니다. 할머님 모시고 같이 갑시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경비 할아버지는 또 한 번 사과하시고, 할머니께 달려가 부축을 하셨다. 할머니는 많이 아프신 것 같았다. 비쩍 마른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는데, 한 발 한 발 걷기가 어려울 정도셨다. 경비 할아버지는 택시기사에게 감사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할머님을 부축해 조심조심 함께 걸어오셨다. 연신 나에게 죄송하다고 말씀하시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현관 입구에서 엘리베이터까지 천천히 걸어오시는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그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긴긴 시간, 나는 부끄러웠다.


오랫동안 문이 열린 채 기다린 엘리베이터가 땡땡 소리 내며 울기 시작했다. 눈치 없는 그 소리가 마치 아까의 나 같아서, 나는 또 부끄러웠다.


한참만에 모두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할머니는 어눌한 말투로 “고마워요.” 말했다. 경비 할아버지도 “감사합니다.” 인사했다. 나는 그저 새빨개진 얼굴로 조그맣게 물을 뿐이었다.


“몇 층 가세요?”

“13층이요.”


13층 버튼을 눌렀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는 어색하지만 뭉클한 공기가 흘렀다. 할머니는 연신 ‘고마워요. 미안해요.’ 말씀하셨고, 경비 할아버지는 땀을 훔치며 ‘아니에요. 허허.’ 웃으셨다. 그리고 조용한 나는 13층에 따라 올라가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오래 눌러드렸다.


경비 할아버지는 혼자 사시는 13층 할머니의 장보기를 매번 이렇게 도와드린다고 하셨다. 그 바쁜 일들 와중에 이 일도 해내고 계셨다.


그날 이후. '호호 할아버지 경비 아저씨’에게 나는 특별한 호칭을 하나 더 선사해 드렸다.


이름 하야 젠틀맨 할아버지.

사람들은 교양 있고 예의 바른 남자를 ‘신사’ 또는 ‘젠틀맨’이라고 부른다. 할아버지에겐 더없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신사’보단 ‘젠틀맨’이 왠지 더 근사하고 세련된 것 같아서. 그리고 살짝 걸쳐 쓴 모자와 사부작사부작 걸어 다니시는 할아버지 폼엔 ‘젠틀맨’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나는 할아버지를 그렇게 부른다. 이토록 멋진 젠틀맨이 오래도록 일해 주셨으면 좋겠다.


우리 아파트에는 젠틀맨이 산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오늘도 아파트를 지키는 호호 할아버지 젠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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