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수리 May 02. 2016

월요일의 두 시

어느 오월의 골목길 풍경

지독한 감기에 목이 꽉 막히고 머리가 핑핑 돌아서, 오늘은 일들 다 미뤄두고 그냥 푹 쉬어야겠다고 작정했다. 그 와중에 커피 생각이 났다. 따뜻한 커피 하나만 테이크아웃 해올 요량으로 꽁꽁 싸맨 채 집을 나섰다.


현관을 나서자 후끈한 공기가 달려들었다. 맑은 날은 아닌데 공기가 덥다. 화단 가득 피었던 철쭉은 어느새 다 시들었다. 누렇게 시든 꽃잎이 통째로 뚝뚝 떨어진다. 녀석, 올봄도 예쁘게 고생했다고. 마음으로 속삭였다.


아파트 뒷문으로 나섰다. 고물상 털보 아저씨가 고물 의자 하나를 내어다가 벚나무 아래 앉아 계셨다. 이 동네에서 두 번의 봄을 지내면서, 나는 잎이 초록초록한 나무를 보고도 '요놈은 벚나무구나' 구별해낼 수 있게 되었다. 벚꽃이 진자리에는 털보 아저씨가 피어난다. 여름 내내 나무 그늘 아래서 부채질을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 온갖 참견을 다 하실 거다. 아저씨의 개구진 눈빛과 인사하며 나는 종종종 걸어갔다.


동그라미가 날아다닌다. 연립주택 2층 현관에서 꼬맹이들이 또 비눗방울을 불고 있다. 이 골목에서 자주 마주치는 풍경이다.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데 둘 다 난간까지 키가 닿지 않아, 고 녀석들 머리카락도 안 보인다. 그치만 동그라미 비눗방울들이 그 집 현관에서 노래처럼 흘러나온다. 수십 개의 방울들은 음표처럼 떠다니다가는 퐁퐁퐁 터진다. 잠시 노래가 멈추면, 두 꼬맹이의 웃음소리가 정적을 채운다. 걸어가는 골목 양옆으론 다 비슷비슷한 주택들로 채워져 있지만, 그 집만은 좀 다르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따뜻한 무언가가 나를 미소 짓게 한다.


건너편 길가에 여태 파자마 차림인 아주머니와 딸내미가 담벼락 위아래를 살펴보고 있다. 까치발을 들었다가, 길바닥에 머리를 박았다가. 으야오옹. 어디선가 간질간질 애끓는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어디 숨었니.""엄마, 얘 못 찾는다." 다른 곳에서 또 으야오옹. 긴 울음이 반복적으로 들려온다. 바야흐로 5월. 고양이들의 발정기도 시작되었다. 불어오는 봄바람에 요놈들 자꾸만 운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고양이 털 같은 하얀 꽃씨들이 나풀나풀 떠다닌다. 안 그래도 들뜬 열에, 간지러운 꽃씨에, 미지근한 공기에 나는 눈자위가 뜨끈했다. 자주 기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인지, 나처럼 발간 얼굴로 재채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왠지 안심됐다. 심보 참 이상하지. 생각하면서도 나는 빙그레 웃었다.


한 달간 문을 닫았던 집 앞 단골 카페가 다시 문을 열었다. 익숙한 점원이 주문을 받았다. 내 기억으론 일 년 전쯤 이 카페에서 일했던 점원이었다. 반가웠다.


"라떼 한 잔 테이크 아웃이요."

"따뜻한 거 맞으시죠?"

"네. 그런데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그렇죠? 저 다시 돌아왔어요."


점원이 커피와 함께 하얀 봉다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백설기예요. 식기 전에 드세요."

"감사합니다."


만져보니 아직 따뜻했다. 오른손엔 따뜻한 커피를, 왼손엔 따뜻한 백설기를 들고서 다시 집으로 걸어갔다. 아까 스쳐 갔던 풍경들이 다시 돌아온다. 내 손이, 내 눈이, 내 마음이. 따뜻하지 않은 곳이 정말 하나도 없다.   


"맛있는 거 사 잡수시나 보네."


털보 아저씨가 말을 건다.  


"네. 아저씨, 이따가 비 오기 시작한대요. 조심하세요."


으응으응. 살가운 대꾸에 아저씨가 웃었다.

웃는 입가로 조르르 박힌 은색 수염이 반짝반짝 빛났다.


나는 오늘 꼭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별거 없는데도, 이토록 따뜻한 하루를 어떻게든 잡아두고 싶어서.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그래서 이렇게 일기를 쓴다.  




+ 4월 15일에 찍어둔 사진. 집 앞, 골목길을 지나가는데 꼬맹이들이 비눗방울 불면서 놀고 있었다. 키가 너무 작아서 머리카락도 안 보이는 녀석들이 후후, 비눗방울 잘도 분다.   


+ 오늘 카페 직원이 건네준 커피와 백설기. 집에 도착해서도 양 손이 따뜻했다. 한 입 떼어먹으니 아. 달다.

매거진의 이전글 화요일의 젠틀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