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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May 21. 2016

토요일의 김밥

나의 첫 번째 생일의 맛

처음으로 친구의 생일파티에 놀러 갔던 건 아홉 살 때였다. 그때 나는 한 반에 다섯 명이 전부인 시골 분교에서 한 반에 서른 명이 훌쩍 넘는 소도시 학교로 전학 온, 따끈따끈한 전학생이었다. 커다란 교실과 빽빽한 책상, 얼굴 익히기조차 벅찬 친구들과의 생활에 적응하느라 나의 아홉 살은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내 짝꿍은 인기 많은 남자애였다. 딱 봐도 비싼 가방과 학용품을 가지고 다녔고, 입고 오는 옷마다 귀티가 났다. 남자애답지 않게 하얀 피부와 동그란 눈망울, 그리고 새침한 성격이 더더욱 부잣집 도련님 같았다. 쉬는 시간이면 짝꿍 주위로 여자애들이 몰려들었다. 그럼 나는 시끌시끌한 그 곁에서 괜히 주눅이 들어,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앉아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짝꿍이 알록달록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우리 집에서 생일파티를 열 거야. 너도 놀러 와.”

“생일파티?”


종이에는 ‘Happy Birthday! 생일파티에 초대합니다.’라는 색색의 글자가 적혀있었다. 처음 받아본 초대장이었다. 특히나 ‘파티’라는 세련된 외래어가 무척 신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생일이면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여는 또래 문화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촌뜨기였으니까.

짝꿍의 생일.

나는 조금 늦게 그 애의 집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자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아무렇게나 벗어둔 신발들이 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고, 와하하 즐거운 웃음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네가 전학 온 친구구나. 어서 와.”


공주처럼 머리가 길고 예쁜 짝꿍 엄마가 나를 맞아주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넓은 거실에 들어서자, 기다란 상 앞에 스물댓 명의 친구들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고깔모자를 쓴 짝꿍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나는 멀찍이 떨어진 구석 자리에 앉았다. 나름대로 꾸미고 온다고 아끼는 꽃무늬 조끼를 입었는데, 머리도 양 갈래로 땋았는데, 모아둔 용돈으로 선물도 사 왔는데.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친구들은 익숙하게 생일파티를 했다. 케이크에 초를 꽂고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불었다. 폭죽이 팡팡 터지고 요란한 박수가 쏟아졌다.


생일상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놓여있었다. 치킨, 피자, 돈가스, 잡채, 그리고 내 앞엔 김밥이 놓여 있었다. 짝꿍이 내민 생일초대장처럼 알록달록한 김밥들이 층층이 케이크처럼 쌓여있었다. 나는 다른 음식은 손도 안 대고, 내 앞에 김밥만 하나씩 집어 먹었다.


동그란 김밥을 앙 하고 한 입 넣자, 침이 고이고, 고소한 김과 고슬고슬한 밥, 동강동강 귀여운 재료들이 뒤섞이고, 말랑말랑하거나 아삭아삭한 식감이 느껴지고, 씹을수록 달콤한 맛이 났다. 그건 내가 처음으로 느껴본 생일의 맛, 뭐라 표현할 수 없이 경쾌하고도 즐거운 맛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에게 김밥은 특별한 음식이 되었다. 일 년에 딱 하루, 많은 친구의 축하 속에서 멋진 주인공이 되는 날, 엄마가 정성껏 돌돌 말아준 김밥은 케이크 못지않게 부럽고도 맛있는 음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생일이었다. 하지만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았기에 짝꿍처럼 멋진 파티를 할 순 없었다. 그 후로도 나는 종종 친구들의 생일파티에 놀러 갔다. 그때마다 친구들이 못 견디게 부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마도 난 일찍 철이든 아이였던지. ‘엄마, 나도 생일파티 해줘.’라고 무턱대고 조르지 못했다.  


열 살이 되었다. 다시 내 생일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아침, 엄마가 말했다. 학교 끝나면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오라고. 그리고 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김밥!”


나는 우렁차게 외쳤다.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과 집으로 향했다. 열댓 명을 끌고 가기엔 거실이 좁았기 때문에 친한 친구 네 명만 데리고 갔다. 처음으로 나를 생일파티에 초대해줬던 옛 짝꿍도 함께.


집에 도착했을 때, 우리 집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솔솔,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가슴이 뛰었다. 거실에 들어서자 푸짐한 생일상이 보였다. 치킨, 잡채, 케이크, 그리고 김밥. 엄마는 그때까지도 앞치마를 두른 채, 돌돌 만 김밥을 동강동강 자르고 있었다. 좋아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난생처음 친구들과 함께하는 나의 생일파티.

우리는 케이크에 초를 꽂고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껐다. 폭죽이 팡팡 터지고.


“생일 축하해.”


엄마와 친구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벅찬 마음으로 생일상을 내려다보니, 수북하게 쌓인 김밥이 색색깔 꽃처럼 활짝 피어있었다. 얼른 김밥부터 입에 물었다. 앙 하고 한 입 넣자, 침이 고이고 마음이 간질간질하더니 찔끔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너무너무 좋아서 그만 와앙 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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