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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Sep 10. 2017

오늘 실패를 기념해

위로의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

친구와 유명한 디저트 카페에 갔다. 손님으로 북적이는 카페. 투명한 진열장에 조그만 수제 케이크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겨우 손바닥만 한 케이크가 제법 비쌌다. 하지만 케이크는 그래도 용서할 수 있다며 우리는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을 사 먹었다. 그런데 친구가 옆 테이블을 흘깃거렸다. "혼자 왔나 봐."


옆 테이블에는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우리 것과 같은 케이크를 앞에 두고서. 카페에서 혼자 케이크를 먹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앉을 자리도 찾기 힘들 만큼 사람들로 북적이는 카페에서 혼자 케이크를 먹기에, 여자는 흔치 않은 차림새였다. 단정한 정장 차림에 검은 구두, 깔끔한 올림머리와 짙은 화장 속에 비치는 앳된 얼굴은 딱 봐도 면접을 보고 온 학생 같았다.


그녀는 음료를 시키지도, 케이크를 접시에 담아 오지도 않았다. 포장 상자에서 꺼낸 케이크 한 조각을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소란한 카페 풍경과 정반대인 그녀의 모습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냈다. 찰칵 찰칵. 셔터음이 날 때마다 주위를 살피며 케이크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케이크 비닐 띠를 떼어냈다. 모든 행동이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다. 상자에서 포장용 플라스틱 포크를 꺼낸 그녀, 케이크를 한 입 떠먹었다. 그뿐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 한 입을 잠시 음미하고는 다시 상자에 케이크를 담아 서둘러 카페를 나셨다. 친구는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말할 수도 없었다. 사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고.



몸도 마음도 추웠던 취업준비생 시절이었다. 그해 겨울, 나는 카페 구석에 한 시간째 앉아 있었다. 1분 자기소개와 지원동기, 성격의 장단점과 입사 후 포부 같은 면접 문항들을 달달달 외고 있었다. 그동안 열댓 군데 입사 지원을 했지만 면접을 보자고 연락 온 곳은 여기뿐이었다. 유명하지 않은 작은 회사여도 상관없었다. 면접이라도 볼 수 있단 사실이 무척 기뻤다.


면접시간보다 두 시간 일찍 도착했다. 회사에 들러 면접 장소를 확인하고 회사 팸플릿을 두어 장 챙겨 와 카페에서 기다렸다. 근처에 있는 유일한 카페이기에 들어왔지만 커피가 비싼 곳이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추위와 허기를 달랬다.


커피 한 잔 사 먹기도 빠듯한 주제에, 나는 78만 원짜리 투피스 정장을 입고 있었다. 다 똑같아 보여도 비싼 게 제값을 한다며 지난봄 엄마가 사준 정장이었다. 여태 입었던 옷 중에서 가장 비싸고 무거운 옷이었다. 면접마다 입고 가야지 마음먹었지만, 봄 여름 가을을 지나 겨울에야 처음 입게 될 줄은 몰랐다. 코트를 걸쳤는데도 얇은 정장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추위 탓인지 긴장 탓인지 나는 으슬으슬 떨었다.


시간에 맞춰 대기실에 도착했다. 비슷비슷한 인상과 차림새의 지원자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대기실 맨 앞자리 앉았다. 회사에 발을 딛고 들어선 순간부터 면접은 시작된다.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모든 태도가 점수에 반영된다. 수많은 면접 후기에서 읽었던 이야기였다. 자세를 고쳐 앉고 방긋 미소를 지었다. 잘 하자. 나의 첫 면접이었다.


면접은 짧게 끝났다. 면접장에 들어선 나는 와들와들 떨다가, 백지장이 된 머리로 횡설수설하다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억지 미소만 짜내다가는 나왔다. 내 뒤에는 나보다 훨씬 괜찮아 보이는 지원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첫 면접을 완전히 망쳐버렸다.


밖으로 나왔다.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철 지난 정장은 추웠고, 나는 상처받았다. 창피했다. 한심했다. 속상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엄청난 감정들이 마구 뒤엉켜 머릿속이 새하얬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제자리만 서성거렸다. 그러다 들어간 곳이 아까 그 카페였다.


아까는 몰랐는데 카페는 아늑하고 따뜻한 곳이었다. 주황 불빛이 반짝이고 온풍이 감도는 카페. 유리 진열장에는 아기자기한 조각 케이크가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초콜릿 케이크를 샀다. 그 돈이면 종일 카페에서 공부할 수도 있었지만, 그날만큼은 비싼 케이크 한 조각쯤 고민 않고 사 먹고 싶었다.


초콜릿 케이크를 앞에 두고 앉았다. 작고 예쁘고 비싸고 달콤한 케이크. 멀뚱히 케이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잘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잘 할 수 있었는데 잘 하고 싶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다시, 잘 해낼 수 있을까.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그 눈물 꿀꺽 삼키고 초콜릿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사무치게 달았다.


'오늘 실패를 기념해.'


나는 오늘의 실패를 간직하기로 했다. 청승맞고 우스워도 어쩔 수 없었다. 괜찮다는 말조차 건넬 수가 없는 최악의 하루. 나마저 나를 다그치고 비웃는다면, 다시는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나라도 나를 위로해야 했다.


실패도 좌절도 절망도 다 내 것이라고 애써 나를 토닥였다. 내가 실패한 오늘이 다른 사람에게 기념일이 되어선 안 된다고. 나만의 기념일이어야 한다고. 나는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을 꿀꺽 삼키며 다디단 초콜릿 케이크를 먹었다. 잊지 못할 기념일이었다.



"케이크 좋아해?"

친구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케이크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까?"
 

"어떤 책에서 이런 얘기를 읽었어. 케이크를 좋아한다는 말은, '케이크'란 말에서 떠올릴 수 있는 달콤하고 조촐한 행복의 이미지를 좋아한다는 의미라고."

"맞는 말 같아. 우린 행복해지고 싶을 때마다 케이크를 찾으니까. 기념일마다 꼭 케이크를 사는 걸 보면 말이야."


나는 초콜릿이 잔뜩 묻은 포크를 콕콕 찌르며 말했다.


"사실 나, 이렇게 비싼 케이크를 맘 편히 사 먹을 수 있게 된 지 얼마 안 돼."
"나도 그래."

"아무래도 좀 비싼 행복인 것 같다."
"그래도 지금 행복하니 된 거야."
 


그래. 너도나도. 그리고 좀 전에 그녀도. 이 조그맣고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를 먹는 동안은 행복했으면 좋겠다. 케이크 한 조각만으로도 충분한 마음이었으면, 그리하여 오늘 하루가 조촐하게 기념할 수 있는 저마다의 기념일이었으면. 그러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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