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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Sep 17. 2017

좋아하는 마음

라라라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33세부턴 듣던 노래만 듣는다.


그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나이가 들면 생소한 음악에 대한 흥미가 급속도로 떨어져서 평균 33세부턴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을 듣지 않는다고. 기사를 읽을 때만 해도 노래를 듣고 있던 서른 살의 나는 정말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좋은 노래가 얼마나 많은데 듣던 노래만 들으며 살다니. 너무 팍팍한 삶 아니야? 설마 나도 그럴까 싶었다.


그런데 올해로 서른두 살이 된 나. 새로운 노래를 찾아 들을 일이 도통 없다. 아니, 듣던 노래조차 들을 여유가 없다. 사는 게 이렇게 바빠질 줄 몰랐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역할이 늘어나고 밥벌이가 빠듯해지자 좀처럼 노래 들을 여유가 없었다. 자연스레 흥미도 관심도 떨어졌다. 서른두 살의 나는, 그냥 눈 감았다 뜨면 아침인 날들을 너무나 팍팍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루는 남편과 일과를 마치고 텔레비전을 켰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데뷔 20주년을 맞이한 자우림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빠, 자우림 데뷔한 지 20주년이래."
"벌써? 시간 빠르다. 우리 콘서트 갔을 때가 언제였지?"


"연애 때니까, 한 5년 전이었나."
"크리스마스 콘서트였지?"
"응. 크리스마스이브에 이태원에서."


"그때 좋았는데."
"정말 좋았었어."


자우림은 남편과 내가 학창 시절부터 오랜 시간 좋아한 밴드였다. 우리는 앨범을 모으고 재킷 사진을 그리고 가사를 음미하고 노래를 들었다. 이어폰을 끼고 자우림의 노래를 듣던 남편과 나. 서로 다른 공간 다른 시간에 살았지만, 자우림의 노래로 이어졌을 우리들의 세계를 상상하면 로맨틱하다. 왠지 뭉클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뮤지션이 같다는 건 우리 만남에도 큰 영향을 줬다. 첫 만남 때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것들을 묻고 또 물었고, 그러다 자우림 이야기에 푹 빠져 같이 노래를 듣고 또 들었으니까. 때마침 자우림이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빠, 나 툭하면 밤새던 방송작가 시절 기억하지? 이틀 밤새고 집에 들러 잠깐 옷 갈아입고 다시 출근하던 길이었어. 아. 바쁘다 졸리다 서럽다. 그런 울적한 맘으로 이 노래 들으면서 걷고 있는데, 갑자기 첫눈이 내리는 거야. 첫눈이랑 노래가 너무 좋아서. 추운 거 꾹 참고 방송국 근처 빙빙 돌면서 이 노래만 한참 들었었어.”


서른두 살이 되기 전, 혼자였던 나를 떠올려본다. 자주 외롭고 가끔 홀가분했던 그 시절의 나. 그때 나는 혼자라도 괜찮았다. 좋아하는 노래가 곁에 있으니.


자우림 노래를 들으며 버스 창가의 바람을 느끼던 오후, 콜드플레이 노래를 들으며 노을 지는 거리를 걷던 저녁, 넬의 노래를 들으며 짙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던 새벽, 엘리엇 스미스 노래를 들으며 까만 방구석에 구겨져 있던 밤.


좋거나 나빴던 날들. 내 곁에 머물던 노래들은 귓바퀴를 굴러다니며 속삭였다. '아름다워. 너의 세계는 이토록 아름다워.' 하고. 아. 정말이지 노래가 없는 세상은 상상만 해도 쓸쓸하다. 그래서 요즘 내 마음이 쓸쓸한 건가. 난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있잖아. 서른세 살부턴 더 이상 새로운 노래를 듣지 않는대. 나는 안 그럴 줄 알았거든. 그런데 요즘 내가 그래. 노래만이 아니야. 영화도, 책도, 친구도, 글쓰기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마주 볼 여유가 없어. 그냥 눈 감았다 뜨면 아침이야. 사는 게 너무 바쁜 거 있지. 어른들은 다 이렇게 사는 건가. 이렇게 팍팍하고 쓸쓸한 채로." 


남편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런 고민이라도 하고 있잖아. 정신없이 살다 보면 하다 하다 모든 게 다 귀찮아질 때가 있어. 그냥 텔레비전이랑 스마트폰만 보다가 잠드는 게 일상이 되어 버리는 거지. 아예 좋아하는 것조차 사라지는 거야. 그런데 지금 넌 아니잖아. 나는 이런 고민을 하는 네가 좋아. 우리 가끔은 텔레비전 켜는 대신에 음악 들을까? 듣던 노래만 들어도 어때.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거지."


"오빠, 방금 되게 어른 같았어. 우리 내년에는 꼭 자우림 콘서트 가자. 이젠 체력 때문에 스탠딩석은 못 가더라도."


우린 마주 보고 웃었다. 아기들이 아장아장 크고 있는 한, 우리는 내년에도 자우림 콘서트에 가지 못할 게 뻔하다. 그래도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남편이 있어 고마웠다. 좋아하는 노래는 자주 못 듣는다 해도 좋아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나는 밤에 설거지를 하면서 블루투스 스피커로 노래를 듣는다. 남편과 뒤늦게 본 라라랜드 OST, 검정치마와 10cm의 새 앨범, 라디오 '푸른 밤 이동진입니다'를 듣는다. 잠든 가족들이 깰 세라 소리 죽여 듣는 노래들. 쏴아아 물소리에 어렴풋한 멜로디지만 나는 행복을 느낀다. 이 노래 좋다. 기억해뒀다가 남편이랑 같이 들어야지. 라라라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까만 밤이 쓸쓸하지 않다.


비단 음악뿐일까. 점점 나이가 들수록 먹고사는 일에 떠밀려 좋아하는 것들에 소홀해질 때가 많다. 아무리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만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는 일들이 귀찮아지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세상을 두리번거리던 스무 살처럼, 노래를 들으며 낯선 거리를 쏘다니던 여행처럼, 밑줄 그은 문장을 다시 꺼내 읽던 마음처럼. 앞으로의 날들도 그렇게 살고 싶다. 이제는 혼자가 아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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