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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Sep 24. 2017

인생이라는 책을 쓰는 일

우리, 죽기 전에 책 한 권은 써야 하지 않겠어요?

다큐멘터리에서 숲지킴이로 일하는 스페인 남자를 본 적 있다. 그가 했던 말이 참 인상 깊었다.


"스페인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죽기 전에 해야 할 세 가지 일이 있다고. 아이 한 명을 낳고, 책을 한 권 쓰고, 나무를 한 그루 심는 일. 그걸 해낸 인생은 잘 살았다고 하죠."


남자가 말한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뭘까? 아마도 책을 쓰는 일이 아닐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고, 또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어렵게만 느껴지니까. 책을 쓴다는 건, 너무나 멀고 대단한 일. 한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서른 살 여름, 나는 작가수업에 등록했다. 4년 차 방송작가가 작가수업을 찾아가다니.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그간 방송작가로 일했어도 정작 내 글을 쓰진 못했다고. 이젠 내 이야기를 쓰고 책도 내보겠다는 간절한 꿈이 있었다. 불쑥 밥벌이를 제쳐두고 뜬구름 같은 꿈을 잡겠다며 뛰쳐나온 터, 주위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나 역시 서른이란 나이가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더 주저하다간 꿈꿀 기회조차 놓칠 것만 같았다.


막연하고도 막막한 마음으로 작가수업에 간 첫날, 나는 조금 놀랐다. 늦었다고 생각한 내가 막내였다. 그곳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직접 그림책을 만들어 보겠다는 무명의 일러스트 작가, 손주들에게 읽어줄 동화책을 쓰고 싶은 교장선생님, 공모전에 도전해 정식 작가로 등단하고 싶다는 주부, 한국문화를 쉽게 전할 수 있는 이야기책을 만들고픈 문화연구가. 30대부터 60대까지 나이도 이력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 단 두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항상 지각생이 많았다. 아르바이트를 미루고, 아이들을 맡기고, 회사를 퇴근하고, 지방에서 KTX를 타고 오느라고 나보다도 훌쩍 나이 많은 어른들이 허리를 굽힌 채 살금살금 들어왔다. 불쾌하진 않았다. 모두 그럴만한 사정 하나씩은 품고 있었고 그 산만한 분위기를 눌러버릴 만큼 학구열이 뜨거웠으니까.


뒤늦게야 하고 싶은 공부를 시작한 늦깎이 학우들. 우린 인생에서도 지각생이었다. 치열하게 사느라 잠시 미룬 꿈을 이제라도 배워보고자 모인 지각생들. 그래서일까. 교실을 가만히 둘러보고 있노라면, 어떻게든 수업에 들어와 공부하려는 그 간절함이 너무도 짠해 마음이 시큰해졌다.



수업은 거의 합평으로 이뤄졌다. 매시간 각자 써온 글을 나눠 읽고 의견을 나눴다. 내 글을 공개적으로 읽고 평가한다는 건, 무서울 정도로 긴장되는 일이었다. 그보다 일단 수업이 진행되려면 어떻게든 내 글을 써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글감을 찾고 짬짬이 글 쓰는 하루가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써온 글. 대부분이 형식만 다를 뿐 자전적 이야기였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서툰 글에도 감정이 느껴졌다. 이상했다.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인데 뭉클해지는 걸 왜일까. 마주 앉은 우리 생김새가 다 다르듯 세상엔 이다지도 다 다른 삶들이 있었다. 내 삶에도 글로 쓸 만한 특별한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 그동안 쓴 글을 모아서 문집을 만들어 봅시다.”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우린 직접 책을 만들기로 했다. 각자의 시간을 조금씩 쪼개 역할을 나눴다. 서로 쓴 글을 교정해주고 무명의 일러스트 작가가 표지를 그리고 전직 편집자였던 주부가 편집을 맡았다. 그렇게 완성된 원고를 인쇄소에 넘기자 불과 2주 만에 책 한 권이 뚝딱 완성됐다.


종강일에 직접 만든 책을 나눠 가졌다. 생김새도 내용도 투박하고 서툴렀지만, 우리가 만든 책 속에는 서른 남짓 학우들의 인생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 이름이 새겨진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뭐라 표현 못 할 울컥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리고 문득 내가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내 삶에 너그럽고 내 꿈에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 교실을 찾아오기 전까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다시 스페인 남자의 말을 떠올려본다. 죽기 전에 내 책을 쓰는 일. 그건 바꿔 말하면 인생을 기록하는 일이 아닐까. 먹고살기 바쁘게만 살았기에 의미 없는 낱말처럼 흩어져버린 내 삶을, 의미 있는 이야기로 다시 기록하는 일. 늦게라도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몰랐을 것이다. 책을 쓰는 일은 절대 어렵지 않다는 걸.


2년이 지난 지금, 나의 늦깎이 학우들은 여전히 바쁜 하루를 살고 시간을 쪼개 글을 쓰고 있다. 누군가는 그림책을 만들고 누군가는 독립출판을 했고 누군가는 등단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그리고 나는 에세이 한 권을 썼다.


이젠 제법 작가라고 불리는 일이 잦지만 내가 뭔가 대단한 꿈을 이루었단 생각은 들지 않는다. 책을 쓰는 일은 나무를 심고 아이를 낳는 일처럼 평범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잠재적인 작가이기에.


그러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도 시작해봤으면 좋겠다. 늦었다고 생각한 꿈을 다시 꺼내고 사람들을 만나고 당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 보길. 이름 모를 당신의 인생은 어떤 책일까. 그 첫 페이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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