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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Oct 01. 2017

반짝반짝 빛나는 텔레비전

쓸쓸하고 그리운 시간의 빛

중학생이었던 나. 토요일이면 숙제할 거리를 싸 들고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가족들이 떠난 집에서 혼자 살았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가 그 집을 떠났을 때부터였다. 할머니는 말수가 적어지고 웃음이 옅어졌다. 어린 눈에도 할머니는 쓸쓸해 보였다. 가까이 사는 손녀니까, 할머니를 챙겨드리고 싶은 마음에 나는 토요일마다 할머니 집에서 잤다.


할머니랑 뭘 했더라. 더듬어보면 밥 먹고 텔레비전 본 기억밖에 없다. 가뜩이나 내성적인데 사춘기였던 손녀는 말이 없었고 무뚝뚝한 편이셨던 할머니도 말이 없었다. 함께 나눌만한 이야깃거리도 없고. 그저 둘이서 멀뚱멀뚱. 머쓱하니 뚝뚝 무뚝뚝. 생각해보면 그런 우리 사이를 어색하지 않게 해줬던 건 텔레비전이었다.


할머니네 텔레비전은 고물이었다. 동그라미 버튼을 돌려야 채널이 바뀌고, 머리통을 탕탕 두드리거나 안테나를 지직지직 움직여야 그나마 선명한 화면이 나왔다. 조그만 고물 텔레비전 앞에서 우리는 하루를 보냈다.


밥 먹고 숙제하고 마늘 까고 콩나물 다듬고. 또 밥 먹고 이불 펴고 곶감 먹고 드라마 보고. 그러다 '주말의 명화'가 시작될 때쯤 나는 스르르 눈이 감겼다. 할머니는 볼륨을 줄이고 외국 배우들이 뻐끔거리는 텔레비전을 보셨다.


할머니 집의 밤. 어디선가 귀뚜라미 뚜루뚜루 울고, 창가에 날벌레들 푸득푸득 날갯짓을 했다. 집 앞 바닷가에서 솨아솨아 파도 소리가, 뒷동산 대숲에서도 솨아아아 바람 파도가 밀려왔다. 자장자장 자장자장. 우리 할머니 집 고 손바닥만 한 세상의 모든 소리가 자장가였다.


나는 졸린 눈을 깜박거렸다. 까만 방. 텔레비전이 소리 없이 빛나고 있었다. 그 빛 아래 할머니도 졸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건넸던 말들을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할머니, 텔레비전 끄고 자요.'

'할머니 안 잔다.'


'거짓말. 할머니도 졸리잖아요.'

'늙으면 잠이 잘 안 와. 자다가도 금방 깨.'

'나는 너무 졸려요. 할머니, 잘 자요.'


반짝반짝. 까만 바다를 비추는 등대처럼 까만 밤을 지키던 할머니의 텔레비전. 소리 없이 반짝이는 불빛 아래, 우리는 나란히 잠이 들었다. 그런 밤이 나는 좋았다.



커서 돈 벌면 우리 할머니 텔레비전이나 한 대 사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흘러, 나는 쌍둥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갓난쟁이 손주들을 보겠다고 엄마가 지방에서 올라온 날이었다.


"요놈들, 할머니 왔어. 할머니!"


엄마는 꼬물이들을 품에 안고 히죽 웃었다. 나는 아직 '할머니'라는 호칭이 어색한데, 엄마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꾹꾹 가리키며 '할머니야, 할머니.'하고 불렀다.


몇 달 만에 만난 엄마는 정말로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고새 흰머리와 주름살이 늘고 몸집이 더 작아졌다. 아기를 안다가도 다리가 아파 아고고고 주저앉고, 자꾸만 하던 말들을 깜빡깜빡했다.


혼자 사는 엄마가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은 깔끄럽다. 멀리 산다고 일 년에 겨우 예닐곱 번 얼굴 보기 힘든데, 그때마다 조금씩 늙어 있는 엄마를 만난다는 건 마음이 아픈 일이다.


엄마. 우리 가까이 살면 좋을 텐데. 밥도 같이 먹고 목욕탕도 같이 가고 하룻밤 같이 자고 그럼 참 좋을 텐데... 바라는 건, 아주 사소한 것들인데도 기꺼이 함께할 수가 없다.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는 더더욱. 그래서인가. 할머니가 된 엄마를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



그날 밤. 거실에 엄마 잠자리를 내어주었다. 엄마는 눕자마자 텔레비전을 틀었다. 아기들 깰세라 소리를 줄인 채 이리저리 채널을 돌렸다.


엄마는 텔레비전을 보는 둥 마는 둥. 아고고. 아기 보는 것도 보통 힘든 게 아니다야. 세상에. 우리 딸이 엄마가 됐네. 이제 시간이 점점 빨리 갈 거야. 눈 감았다 뜨면 아기들은 쑥쑥 큰다니까. 그나저나 우리 딸 힘들어서 어쩌누. 아직도 애기 같은 게 엄마가 됐다니... 종알거리던 엄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꺼풀이 끔벅끔벅 감겼다.


"엄마, 텔레비전 끄고 자."

"안 자. 보고 있어."


"엄마 졸린 거 같은데... 텔레비전 끄고 좀 푹 자."

"이따가. 나이가 드니까 잠을 잘 못 잔다."

"어휴, 고집은..."


나는 알겠다며 아기들 자는 방에 누웠다. 살짝 열어둔 문틈으로 텔레비전 불빛이 반짝거렸다. 그 빛을 바라보는데 왠지 모르게 쓸쓸한 기분이 밀려왔다.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뒤척거리다가 다시 거실에 나갔을 때, 엄마는 잠들어 있었다.


조용히 빛나는 텔레비전이 잠든 엄마의 얼굴을 비췄다. 아파트 도로변 자동차 소리가 솨아솨아 파도 소리처럼 몰려왔다. 엄마의 얼굴에. 그 어린 날 할머니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반짝반짝. 쓸쓸한 얼굴이, 적적한 마음이, 그리운 시간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때는 이 빛이 이렇게나 아린 빛인 줄 몰랐다. 새삼 흘러간 세월이 실감 났다.


엄마. 나 언젠가 이 얼굴을 봤어. '엄마의 엄마'의 얼굴이었지. 우리 함께인 밤이 너무 좋은데, 또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다. 엄마. 엄마.


나는 엄마를 불러보려다 말고 살금살금 다가가 텔레비전을 껐다. 오늘만큼은 엄마가 곤히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텔레비전 잘 자. 우리 엄마 잘 자. 아가들 잘 자. 할머니도 잘 자.’


자장자장 자장자장.

나는 까만 밤 속에서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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