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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Oct 15. 2017

꿈의 상자를 부탁해

한때 뜨겁게 살았었던 우리 꿈의 증거

"나 뮤지컬 배우가 꿈이었어."


어느 날 커피를 마시다가 툭. 언니가 말했다.


"진짜? 나는 왜 몰랐지?"

"내가 말을 안 했으니까."

"왜?"

"그야... 자꾸 생각날 테니까. 그 꿈이."


언니와 나는 12년 지기였다. 대학 방송국 동기로 만나 학교생활은 물론 아르바이트와 취업준비도 같이 하고 나중에는 방송국에서 PD와 작가로 함께 일했다.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니에게는 내게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꿈이 있었다.


"우리 3학년 2학기 때 휴학했었잖아. 넌 어학연수 가고 난 아르바이트하고. 나 사실 그때 뮤지컬 아카데미 다녔어. 아니, 거기서 일했어. 그때 아카데미 6개월 과정 수강료가 대학교 등록금보다 더 비쌌는데. 알잖아. 나 그럴만한 여유 없는 거. 그래서 아카데미 안내데스크에서 일했었어."


학창 시절 우연히 본 뮤지컬에 언니는 첫눈에 반했다. 무대와 노래와 춤. 언니가 좋아하는 모든 게 있었다. 그때부터 언니는 뮤지컬 배우를 꿈꿨다. 하지만 예체능 입시를 준비하기에 사정이 좋지 않았다. 엄청나게 대단한 재능이 있거나, 엄청나게 돈이 많거나 해야 한다는데 언니는 둘 다 아니었다. 음악 공부로 재수를 하긴 했지만, 결국 언니는 수능성적에 맞춰 어문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꿈이 포기가 안 되는 거였다. 한 번이라도 해봐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언니는 졸업을 앞두고 휴학했다.


언니는 6개월 동안 뮤지컬 아카데미 안내 데스크에서 일했다. 문의 상담과 자료조사를 하고 뮤지컬 수업 영상을 촬영하곤 했다. 언니가 데스크 앉아 일하는 동안, 언니 등 뒤에선 늘 노래가 흘렀다. 수업하고 연습하는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저기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연기하고 싶다고 언니는 생각했다. 다행히 일주일에 몇 번, 업무가 끝난 후에 저녁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언니는 자꾸만 주눅이 들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홀로 무대 밖을 기웃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수업을 들으면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그곳에서 재능의 차이가 아닌 열정의 차이를 먼저 느꼈거든. 다른 사람들 열정이 너무 뜨거웠어. 나는 간절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필사적이었지. 그곳에서 만난 지망생들. 학교고 일이고 다 때려치우고 여기에 올인해서 찾아왔단 말이야.


그런데 나는 적당히 현실적인 애인 거야. 배울만한 사정은 안 되고 수업은 듣고 싶고 돈은 벌어야겠고. 그래서 어중간하게 너머로 수업하는 소리 들으면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단 말이지. 게다가 휴학한 것 자체가 어쨌든 돌아갈 곳을 만들어 놓은 거잖아. 나에게 의문이 들었어. 이게 정말 내 꿈일까. 내가 '꿈'이라는 말을 너무 미지근하게 쓰고 있는 건 아닐까하고."



그곳에서 6개월 정도 일했을 즈음,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서너 번 오디션을 봤지만 모두 떨어졌다. 언니는 데스크 일을 관뒀다. 꿈을 그만뒀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낮과 밤, 투잡을 뛰며 돈을 벌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언니는 아무도 몰랐던 꿈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듬해 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대학 방송국 경험을 살려 조연출부터 차근차근.


"알고 보니 나 되게 현실적인 애였더라. 뮤지컬 다음으로 하고 싶었던 일이 방송이었거든. 방황할 틈도 없이 바로 일했어. 그래도 이 일이 적성에 맞는 걸 보면, 꽤 운이 좋은 편인 것 같아."


나는 언니 꿈이 피디인 줄 알았다. 단박에 꿈을 이룬 사람이라고 부러워했던 언니는, 사실 긴긴 시간 조금씩 좌절을 맛보다가 결국 꿈을 포기했다. 포기한 꿈이 다시 생각날까 봐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던 언니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언니. 많이 슬펐을 것 같아. 나는 그 말뿐이었다.


"말도 마. 그때 꿈 포기한답시고. 그동안 연습했던 음원이랑 악보랑 연기집들 다 모아서..."

"설마 다 태운 거야?"

"아니. 차마 태울 용기까지는 없고. 상자에 담아 보냈어."


언니는 오랜 친구에게 그 상자를 보냈다고 했다. 상자를 부탁해. 잠시만 맡겨놓을 게. 언젠가 다시 찾아갈 거야. 당부하면서. 그 후로 8년이 지났다.



나는 8년 동안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상자를 떠올렸다. 먼지 쌓인 상자를 열면 그 안에는, 수백 번은 되감아 들었을 음원과 땀이 배 구깃해진 악보가, 메모 빽빽한 손때 묻은 연기집이 가지런히 놓여있을 것이다. 언니의 노력과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꿈의 상자였다.  


생각해보니 내게도 그런 상자가 있었다. 내 서랍 깊숙한 곳에는 방송작가 시절 썼던 원고 뭉치와 취재 수첩이 있었다. 쓰고 모은 다이어리와 PC에 저장된 수많은 글도. 그건 나의 꿈의 상자였다.


간절하게 이뤄지기를 애쓰던 마음. 꼭 쥐고 매만져 닳고 닳은 손길. 잠을 잊고 무언가에 몰두하던 밤들. 그 시절 우리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긴 상자. 그건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되는 소중한 증거였다. 한때 뜨겁게 살았었던 우리 꿈의 증거.


"언니. 그 상자 다시 찾아올 거지?"

"그럼. 찾아와야지."


언니가 싱긋 웃었다. 이젠 괜찮아. 말하는 것 같았다.


파울로 코엘료가 그랬다. 꿈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는 한 한낱 단어에 불과하다고. 비록 포기했을지라도 언니는 꿈을 경험해봤다. 언니에게 꿈은, 희망이었다가 좌절이었다가 원망이었다가 미련이었다가, 결국에는 그냥 좋아하는 것으로 남았다고 했다.


언니는 여전히 뮤지컬을 좋아한다고 했다. 시간이 나면 공연을 보러 가고 노래와 영상을 찾아본다고. 기획 회의 때마다 뮤지컬 방송 기획안을 내서 좀 무안하다고. 그래도 언젠가 뮤지컬 방송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뮤지컬 얘기라면 아직도 반짝이는 눈을 가진 언니에게,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언니.

언니는 진짜로 꿈을 꿨어. 빛바랜 상자가 그걸 증명해.

우리 젊은 날 찬란하게 빛났었다고. 빛나는 동안 아주 행복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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