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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Oct 22. 2017

따듯한 오지랖

누군가의 오지랖이 고마웠던 날

수리야. 함덕 오면 생자몽 갈아줄게. 오너라^^


SNS에 제주도 여행 사진을 올렸더니 반가운 댓글 하나가 달렸다. 남편이 물었다.


"누구야? 제주도에 아는 사람 있었어?"

"있어. 칼랑코에 선배라고."

"칼랑코에? 그게 뭐야?"

"꽃. 예쁜 꽃."


윤선배. 선배를 떠올리면 난 그날의 칼랑코에 꽃이 생각난다.


대학 시절, 세 번째로 자취방을 옮기던 날이었다. 서울살이 2년 차라 짐이 꽤 될 줄 알았는데 그래 봤자 단칸방이었던지 용달차에 몇 번 옮기자 방이 텅 비어버렸다. 그래도 여기에서 사계절을 보냈는데... 금세 비어버린 방은 몸만 쏙 뺀 이부자리처럼 낯설고 쓸쓸해 보였다. 자꾸만 뭔갈 두고 가는 느낌이 들어 방을 둘러보다가, 에이 모르겠다 출발할까 하던 찰나. 누군가 어기적 걸어오는 게 보였다. 윤선배였다.  


"수리야. 오늘 이사한댔지? 도와주려고."


반갑다기보단 당황스러웠다. 이삿짐 옮기는 걸 도와줄 만큼 친한 선배는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동네 주민이 이사한다는데 와 봐야지."


선배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늘어진 티셔츠에 추리닝 바지와 삼선 슬리퍼, 까치집 머리를 보아하니 선배는 어제도 밤새 술 마시고 겨우 일어나 온 게 분명했다.


윤선배로 말할 것 같으면, 전설의 복학생이자 화석 같은 고학생, 술과 축구와 과방을 사랑하고 두루두루 오지랖이 넓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밥 한 끼 함께 먹어본 적 없는 나까지 선배의 오지랖에 포함된다니.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랬다.


"어쩌죠? 짐이 별로 없어서 다 옮겼어요."

"벌써 끝났어? 내가 너무 늦게 왔네."

"아녜요. 그래도 와주셔서 고마워요."


꾸벅 인사까지 하고 나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선배도 멋쩍은지 괜히 빈방만 둘러보았다. 그러다 별안간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저거!"하고. 선배가 무언갈 가리켰다.


"두고 가는 거냐? 그럼 나 저거라도 줘."


창틀에 놓여 있는 화분, 칼랑코에였다. 왜 이제야 날 발견했냐는 듯, 손톱만 한 빨간 꽃이 볕을 쬐며 송이송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 깜빡한 게 저거였구나. 길거리 트럭에서 이천 원 주고 사 온 화분이었다.  



"선배, 이거 그냥 싸구려 화분인데..."


선물로 주기엔 너무 미안한 생김새였다. 벽돌색 싸구려 플라스틱 화분에 투게더 아이스크림 뚜껑을 화분 받침으로 둔 칼랑코에. 물도 제때 챙겨준 적 없었으니 난 참 무심한 주인이었다. 그래도 잘 자라 꽃도 예쁘게 피었다. 빨갛게.    


"예쁘네. 우리 집엔 살아있는 게 하나도 없어. 나한테 딱 필요한 녀석이야."


화분을 손에 든 선배. 잘 키울게. 그럼 수고! 쿨한 인사를 건네더니 슬리퍼를 끌고 순식간에 총총총 사라졌다. 어안이 벙벙. 어쨌든 나는 용달차에 올라탔다. 영화 속 레옹처럼 칼랑코에 화분을 소중히 껴안고 걸어가는 선배를 지나쳐갔다. 선배도 참. 나는 빙그레 웃었다.

 

선배의 오지랖이 고맙다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방을 옮겨 다니던 기억은 항상 쓸쓸하기 마련인데, 그날만은 따듯했다. 파란 하늘 아래 노란 햇살이 따듯했고 빨간 꽃이 피었던 날. 칼랑코에 꽃처럼 기분 좋은 색깔로 남아있다. 그래서 칼랑코에 선배. 나는 윤선배를 그렇게 불렀다. 이게 선배와 얽힌 내 기억의 전부이다.


그 후로도 우린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SNS 친구로 지내며 서로의 소식을 전해 듣곤 한다. 생각해보면 선배는 내가 결혼을 하거나 작가가 되었을 때, 먼저 정답게 축하 인사를 건넸었다. 선배다운 그 따듯한 오지랖으로 말이다.



"친한 선배야?"

"음...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대답이 희한하네."

"어쨌든 좋은 선배야. 사람이 좀 낭만적이야."


윤선배 졸업했대. 대학가에서 주점 한다던데. 변함없지 뭐.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한다더라. 대학생들이 형님 형님하고 그렇게 따른다고. 건너 건너 소식을 전해 듣던 선배는 어느새 제주도로 내려가 함덕해수욕장에 작은 카페를 열었다.


칼랑코에 선배는 여전히 낭만적으로 살고 있구나. 아마도 선배의 작은 카페엔 살아있는 식물 몇 개쯤은 조르르 놓여있을 거라 생각하며 나는 미소 지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진득하게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소소한 연락이 반가운 사이가 있다. 서로 잊고 살다가도 좋은 소식이 들리면 덩달아 흐뭇해지는 사이. 안부나 한마디 건네 볼까. 그간의 어색함도 잊고 괜한 오지랖을 발휘하고픈 그런 사이. 따듯하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미지근한 일상의 온도를 다정하게 데워준다.

  

칼랑코에 선배. 윤선배를 생각하면 칼랑코에 꽃이 떠올라 기분이 좋다. 그리고 여전히 '수리야' 정답게 이름을 불러주는 그만의 따듯한 오지랖이 나에겐 선물처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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