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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Oct 29. 2017

코끝이 찡 눈물이 핑

밥이라도 잘 챙겨 먹어

속상했다.


미안해. 갑자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지 뭐야.


메시지 한 통에 약속이 깨져버렸다. 오랜만에 친구를 보러 낯선 동네까지 찾아온 저녁. 도착하자마자 바람맞았다.


친구는 연신 미안하다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나는 답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괜찮아 다음에 보자며 넘어갈 수 있을 텐데. 그날은 나도 컨디션이 별로였다. 밤새우며 방송 원고를 털어내고 온 길, 잠 못 자고 피곤해서 예민한 까닭도 있었지만 나는 다른 게 더 속상했다.


고단한 하루를 보냈어도 설레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친구는 잠깐 얼굴조차 비추지 않고 메시지로 약속을 깼다. 내가 친구의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 같아 마음이 상했다. 미안하단 말에 괜찮다고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괜찮지 않았으니까. 그걸 친구가 알았으면 했다. 정말이지 꼬일 대로 꼬인 심보였다. 갑자기 깨진 약속은 그토록 뾰족했다.


집으로 돌아갈 길이 아득했다. 해는 졌고 배는 고프고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울적하고. 한 발 디디는 것조차 힘들어서 그냥 편의점에 들어갔다. 창가 스탠드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을 때, 그 애를 만났다.


내 옆에는 초등학교 사오 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혼자 앉아있었다. 내가 앉자 옆자리에 올려둔 제 가방을 슬그머니 치워주기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그 애는 책가방을 껴안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저녁 7시가 훌쩍 넘었는데도 혼자 하굣길 차림인 걸 보면 학원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남자애 앞에는 다 비운 컵라면 용기와 삼각김밥 비닐이 놓여있었다. 설마 저게 저녁인 건가. 괜한 걱정이 들었다. 문득 남자애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몸을 움츠렸다. 미안한 마음에 나도 모른 척 고갤 돌렸다. 그래 봤자 커다란 편의점 통유리에 우리 모습이 비치고 있었지만. 둘 다 많이 지쳐 보였다. 그때 남자애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 언제 와? 벌써 30분 지났잖아. 응. 대충 뭐 먹었어. 엄마. 여기서 숙제를 어떻게 해. 알았으니까 빨리 와.”


학원 끝나고 데리러 오겠다던 엄마가 많이 늦었나 보다. 때마침 나도 피디에게 연락이 왔다. 수정하고 조율해야 할 사항이 몇 있다고. 어쩔 수 없이 앉은자리에서 일했다. 한참 동안 남자애도 나도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따금 편의점 문소리가 들릴 때마다 남자애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다.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나는 허기라도 채울 겸 컵라면을 골랐다. 진열대에 불닭볶음면이 보였다. 아까 남자애가 먹었던 컵라면. 요새 애들은 이거 되게 좋아한다던데 맛있을까. 많이 매우려나. 나는 불닭볶음면을 집었다. 물 붓고 자리에 앉아 멀뚱히 익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결국은 혼자 라면이네. 바람 맞힌 친구가 원망스러워지려는 찰나.


“엄마는 왜 맨날 약속을 못 지켜.”


남자애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애. 화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속상해하고 있었다. 엄마가 안 오는 게 아니라 못 오고 있다는 걸. 약속을 꼭 지키고 싶지만 못 지키고 있다는 걸 그 애는 알고 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휴대폰 너머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언젠가 학원 선생님인 친구가 그랬었다. 요즘 애들은 밖에서 놀 시간이 없다고. 엄마 아빠는 맞벌이에 바쁘고 학교 끝나면 아이들 어디 맡길 곳도 마땅치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학원 여러 개를 뱅뱅 돌린다고. 저녁 시간 학원에 오는 애들이 ‘선생님 배고파요. 밥 못 먹었어요.’ 소리가 정말 마음 아프다고. 어른이고 아이고 다 안타까운 현실이지 뭐. 친구는 말했다.


그땐 너무 다른 세계 얘기 같아서 와 닿지 않았는데. 남자애를 보고 있자니 이게 진짜 우리 세계 얘기였구나 싶었다. 내가 다 쓸쓸하고 안타까웠다.



남자애가 내 눈치를 볼까 봐, 나는 모르는 척 얼른 불닭볶음면을 비벼 먹었다. 나무젓가락으로 크게 한 입 먹었는데. 맵다. 너무 매웠다. 너 이걸 밥이라고 먹은 거야?


편의점 유리창에 다시 고개 숙인 남자애가 비쳐 보였다. 넌 얼마나 자주 이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을까. 얼마나 오래 여기에서 엄마를 기다렸을까. 당장 달려오지 못하는 엄마는 또 얼마나 많이 미안해했을까. 그런데도 너 참 잘 자라주었구나. 어쩌면 어른인 나보다도 속이 깊구나.


화 많이 났지. 정말 미안해.


친구에게 메시지가 왔다. 아직 말단 사원에 일하는 것도 퇴근하는 것도 눈치 봐야 할 나의 친구. 친구에게도 오지 못할 사정이. 전화조차 하지 못할 사정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매워서 쓰린 입술을 꾹 다물고 친구에게 답장을 보냈다.


괜찮아. 다음에 봐.

대신 밥이라도 잘 챙겨 먹어.


내 옆자리 남자애에게도 말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냥 새빨간 라면 한 입 먹을 뿐이었다.


아 맵다. 코끝이 찡 눈물이 핑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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