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수리 Nov 05. 2017

혼자 사는 엄마의 냉장고

엄마, 우리 따순 밥이나 같이 먹자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낸 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감기 기운이 돌았다. 이런 날에는 혼자 밥 먹기도 싫고 혼자 아프기도 싫고 혼자 집에 있기도 싫고.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나는 무작정 버스에 올라탔다.

 
서울에서 동해까지. 버스를 달려 네 시간이면 엄마 집에 도착할 것이다. 버스 창문에 기대 눈을 감으니 푸른 바다와 포근한 엄마 집, 따끈한 집밥과 엄마 냄새가 못 견디게 그리웠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지금 집에 내려가."
"지금? 갑자기 오는 거야?"


"왜? 가면 안 돼?"

"아니. 그게 아니라. 엄마 오늘 모임이 있는데... 잠깐 얼굴만 비추고 와야겠다. 근데 너 목소리 왜 그래?"
"엄마 나 아파. 열나는 거 같아."


"약은?"
"당연히 안 먹었지."
"다 큰 게 자알 한다! 터미널 도착하면 전화해."  


배시시. 어리광 가득한 전화를 끊고 잠이 들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잠시 눈을 떴을 때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어리광 피운답시고 약을 먹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게다가 자는 동안 버스 에어컨 바람까지 흠뻑 맞은 탓에 감기가 심상치 않았다. 터미널에 도착할 즈음에는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엄마, 나 터미널 도착했어."
"미안해. 못 데리러 갈 거 같아. 택시 타고 집에 가 있어. 분위기 보고 금방 갈게."


뚝. 엄마의 목소리가 시끄러운 사람들 소리에 뒤섞여 끊겨버렸다. 평소였다면 터미널까지 마중 나와 '딸! 왔어?' 호들갑을 떨며 맞아주었을 엄마. 사실 좀 서운했다. 나는 엄마가 보고 싶어서 집에 왔을 뿐인데, 갑자기 찾아와도 엄마는 두 팔 벌려 반겨줄 줄만 알았는데, 불쑥 찾아온 불편한 손님이 된 것 같아 서운했다.


해가 어둑어둑 지고 있었다. 그날따라 택시도 잘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한두 방울 비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몸도 마음도 젖은 빨래처럼 추욱 지쳐버렸다.



도착한 엄마 집. 현관문을 열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엄마가 없는 집은 깜깜하고 쓸쓸했다. 현관 앞에 주저앉자 눈치도 없이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배고프다. 나는 냉장고를 찾았다.


우리 엄마 집은 좀 별났다. 홈스쿨 학원을 운영하는 엄마 집은 거실과 안방이 모두 아이들 책상과 책으로 빽빽했다. 꽁꽁 닫혀있는 작은 방 하나가 유일한 엄마의 방이었다. 그곳에는 옷장도 있고, 텔레비전도 있고, 밥솥도 전자레인지도 있고, 그리고 무식하게 큰 냉장고도 숨어 있었다.


방문을 열자 로봇처럼 우람한 은색 냉장고가 위이잉 돌아가고 있었다. 일 년 전이었던가. 엄마는 갑자기 김치냉장고 기능이 있는 엄청 큰 냉장고를 샀다. 엄마, 너무 안 커? 비싸지 않아? 물어도 엄마는 김치냉장고 하나는 꼭 있어야 한다며 몇 개월 할부로 좁은 방에 그걸 꾸역꾸역 사들였다. 냉장고 때문에 가뜩이나 작은 엄마의 방은 더 좁아졌다. 겨우 다리 뻗고 누울 자리가 전부였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뺨을 비볐다. 뭐 맛있는 거 없나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우두커니. 나는 그 채로 한참을 서 있어야만 했다. 찬바람이 띵하고 머리통을 후려치는 기분. 혼자 사는 엄마의 냉장고엔 먹을 게 없었다.


먹다만 식은 밥이 노랗게 굳어 있고 반찬이라곤 순 장아찌와 깻잎, 김치밖에. 그 흔한 두부 하나 달걀 하나가 없었다. 채소라는 것들도 죄다 시들어 먹지 못할 지경이었다. 냉동실도 마찬가지. 오래된 식재료들이 돌멩이처럼 꽝꽝 얼어있었다. 이건 자취 시절 내 냉장고보다 더 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래 칸 김치냉장고를 열어보았다. 빈틈도 없이 김치통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며칠 전 김장 김치를 보내겠다던 엄마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 엄마 진짜... 차오르는 속상함에 화가 났다. 나는 냉장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최신식 냉장고는 닫히는 소리조차 조용했다. 정말 얄미웠다.  


내가 엄마 사는 모습을, 엄마 마음을 너무 몰랐다. 늘 엄마가 보내주는 맛있는 반찬들이 당연히 엄마의 밥상에도 올라갈 줄 알았다. 늘 엄마가 터미널에 마중 나오는 것이 당연히 엄마가 해야 할 일인 줄 알았다. 늘 엄마는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안심했다. 엄마도 혼자 밥 먹고 혼자 아프고 혼자 산다는 것을 나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늘 받기만 하느라고.   


나는 방바닥에 쪼그려 누웠다. 어두운 방에 위이잉 돌아가는 냉장고 소리. 그리고 차가운 바닥이 느껴지자 이상하게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너무 배가 고파서인지, 열이 올라 아파서인지, 엄마가 보고 싶어서였는지 잘 모르겠다. 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룽어룽. 휴대폰 불빛이 반짝거린다.
  
"엄마."
"이모들 성격 알지? 빠져나오느라고 힘들었네. 배고프지? 먹을 것 좀 사가. 엄마 거의 다 왔다."


서른 살이나 먹고 질금질금 눈물이나 짜는 나는, 불쑥 찾아온 손님이었다. 엄마에게는 언제나 반가운 손님.


엄마가 자는 바닥에 귀를 대고 눈을 감았다. 탁탁탁. 비닐봉지를 흔들며 계단을 올라오는 엄마의 발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엄마. 엄마.

 

어서 와. 우리 따순 밥이나 같이 먹자.



이전 13화 코끝이 찡 눈물이 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