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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Dec 31. 2017

시련을 겪은 덕분에

올해도 감사히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가정 폭력이 있었다. 내가 선택할 수만 있다면 평화로운 가정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나를 평화롭지 못한 가정의 외동딸로 선택했다.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고, 적극적으로 이를 개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녀 시절에 매일같이 이런저런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그 바람에 무척 이른 나이에 인생은 비참하고 어둡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나이에 인생의 밑바닥을 체험한 덕분인지 작은 도움에도 한 줄기 빛을 만난 것처럼 감사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무리 어둔 터널 속에 있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알게 되었다. 세상이 살기 어렵다지만 매년 조금씩이나마 좋아지는 모습도 있다. 나는 그 작은 변화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어려서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겪었기 때문이다. 별것도 아닌 일에 고마움을 느끼는 현재의 내 모습이야말로 그 시절 나를 괴롭혔던 쓰라린 운명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둔다> ‘시련을 겪은 덕분에’


서점에서 우연히 이 글을 읽었다가 소노 아야코의 책을 샀다. 책 날개의 작가소개까지. 내 이야기를 적어둔 것 같았다.

나는 일찍이 인생은 비참하고 어둡다는 것을 깨달은 덕분에 지금 삶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시기만 다를 뿐 누구에게나 시련은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인생을 짓밟는 무자비한 시련이, 평생 잊지 못할 마음의 상처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리고 그 후의 삶은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와 ‘시련을 겪은 덕분에’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에는 한의원에 들렀다. 이른 시간부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이다. 눈을 감고 엎드려 있는데, 옆 칸에 한의사와 할아버지의 대화소리가 들렸다.

“올해 마지막 날이네요.”
“올해도 감사히 살았습니다!”

할아버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문득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찍 겪었든 나중에 겪었든 간에 노인들은 시련의 경험자들이다. 그 후의 삶이 어떻게 되었던가. 얼굴에 주름에 말투에 걸음걸이에 그대로 드러난다. 삶이 빚어낸 형상 같다.

가끔 노인의 얼굴을 하고도 생기와 기품이 넘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아마도 ‘시련을 겪은 덕분에’ 지금이 감사한 이들이리라. 작은 것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타인을 헤아릴 줄 알고 인생을 고맙다 말하는, 그런 노인들을 나는 존경한다. 나도 그렇게 늙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연말 연초에 대한 감이 무뎌진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 서른 줄에 들어서니 정신없는 변화의 연속이다. 일 년보단 하루가 더 와닿는다. 그저 하루하루 살고 있다.

벌써 마지막 날. 올해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고 있다. 나도 모두에게 웃으며 말하고 싶다.

“올해도 감사히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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