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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May 17. 2018

살림만 미워했다

서툰 엄마의 밤

살림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며 독일의 어느 사회학자 말대로 바다 한복판에서 걸레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디 살림만 그러겠는가 싶다. 삶은 그 자체가 낭비다. 사는 게 총체적으로 낭비라는 걸 인지하지 못할 때는 살림만 미워했다. 살림이, 정확히 가사 노동이 지겹고 하찮게 느껴져서 제발 집안일 안 하고 살길 간절히 염원했다. 지금은 아니다. 좀 나아졌다. 콩나물을 다듬고 깻잎을 씻고 쌀을 씻으면서, 땅에서 난 그것들을 만지면 마음이 순해지고 위로를 얻는다. 바닥 구석구석에 어질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담으며 헝클어진 번뇌를 같이 모아버린다. 떨어진 단추를 달고 터진 솔기를 꿰매면서 벌어진 마음의 틈을 메운다. 해 드는 오후 마루에 앉아 빨래를 반에서 반으로 접으며 미련과 회한을 접는다. 날 괴롭히는 것이 날 철들게 한다더니 살림이 그렇다.
- 은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살림만 미워했다'


아이들이 사람 밥을 먹기 시작한 후로 나는 종일 부엌에 산다. 삼시세끼 챙겨 먹이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다. 매 끼니 식단도 달라야 하고 영양도 챙겨야 하고 뭣보다 맛있어야 한다. 어쨌든 하루가 이렇다. 두 녀석 밥 차리고 먹이고 치우고. 좀 쉴라치면 나란히 똥 싸고 씻기고 기저귀 갈고. 물이라도 좀 마실라치면 간식 챙기고 낮잠 재워야 하고. 이러다 보니 엄마 밥은 오후 세 시를 넘어야 첫 끼. 그마저도 차리기 귀찮고 반찬도 없어서 대충 그릇 하나에 담아 먹는다. 그사이에 청소하고 빨래 돌리고 설거지하고. 돌아서면 다시 밥 설거지 청소의 무한 반복.


해도 해도 끝나지 않고 해도 해도 티 나지 않으니 허무하다. 뭔가 가치 있는 보람이나 구체적인 성과를 얻는 게 아니라 힘들다. 가장 무서운 건, 이 일을 적어도 20년은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무서워서 몸서리를 쳤다. 제발 집안일 안 하고 살고 싶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한 번은 아이들에게 줄 간식으로 조각조각 딸기를 써는 나를 유심히 보던 친정엄마가 "아이고 엄마야, 반나절 딸기만 썰래? 애들 밥은 언제 할래?"하고 타박을 줬다. 웃으며 하는 말인 걸 아는데도 괜히 울컥했다. 엄마, 나라고 뚝딱 하고 싶지 않겠어? 애들 쌀미음 처음 만들 때 두 시간 걸린 거 알면 기절하겠네. 하고 왠지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요리를 많이 해본 적 없는 나는 손이 느리다. 엄마가 처음인 나는 집안일이 서툴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닌 해야 할 일을 하게 된 나는 혼란스럽다. 이 일을 앞으로 20년은 해야 하는데 좀 너그럽게 봐주면 안 되나 싶었다. 아니, 나는 어쩌면 내가 하는 일이 하찮은 일이 아니고, 내가 아주 중요한 존재라는 걸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오늘도 콩나물 한 봉 다듬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조그만 녀석들에게 줄 밑반찬 몇 가지 만드는 데만 자정이 넘었다. 가족들이 잠든 밤에 혼자 라디오를 들으면서 허둥지둥 음식을 만들었다. 아무리 봐도 그럴싸해 보이지 않고 간을 봐도 제대로 만든 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 그 와중에 설거지는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당장이라도 집안일 말고 글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콩나물 꼬랑지를 똑똑 잘라내며 생각했다.


엄마도 내 직업이야. 살림도 내 일이야. 어차피 해야 할 거면 즐겁게 하자. 토끼 같은 내 새끼들 맛있게 냠냠 먹어주면 좋지. 살도 포동포동하게 찌고 키도 쑥쑥 크면 좋지. 뾰족하고 모난 마음도 똑똑 잘라냈다. 마침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와 소리를 높였다. 날 괴롭히는 것이 날 철들게 한다는데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언젠가 익숙해지겠지. 괜찮아지겠지. 그냥 좀 즐거워졌으면 좋겠다고. 도닥이는 서툰 엄마의 밤이 지나간다.




@suri.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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