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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ug 11. 2018

내향적인 엄마가 배운 것들

삼키려고 애쓸수록 힘들어지더군요

요즘 우리 아이들은 친구들을 많이 만난다. 녀석들 말고 나 때문에. 얼마 전 육아가 힘들다고 토로한 글을 읽고 아이 엄마인 지인들이 나를 챙겨주기 때문이다.


아이 데리고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 차 끌고 와 우릴 태우고 자기 집에 데리고 간 친구, 베란다 풀장을 만들었다며 놀러 오라던 동네 언니, 아이들 봐주러 갈 테니 그때 넌 글이나 쓰라는 친구. 말고도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와 다정한 안부들. 그녀들은 '조만간 보자'는 말 대신 '지금 만나자'고 말했다. '힘내'라는 말 대신 '힘내자'고 말했다. 그렇게 만나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다가 헤어지면 고마운 마음이 가득 찼다.


좀 내향적인 성격 탓에 사람들과 깊게 친해지기 어렵고 밖에 머무는 일이 부담스러운 나는, 혼자 집에서 두 아이를 보는 일이 생각보다 괜찮았고 앞으로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성격과 우리 아이들이 '쌍둥이'라는 조금 남다른 면 때문에. 쌍둥이 엄마인 나는 고위험 산모로 늘 누워있었고, 조리원에서도 혼자였고, 아이가 하나인 엄마들과 어울리기 애매했고, 병원이나 거리에서 늘 시선을 받았고,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아이들 데리고 혼자 외출하기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외출이라곤 남편과 함께하는 주말이 유일했다. 엄마 개인의 시간을 내기는 더더욱 힘들었다. 아마 아이 둘 이상 키우는 엄마들도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나는 엄마가 되기 전까진 아이와 엄마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다른 세계라고 생각했다. 그들 세계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어떻게 시간이 흘러가는지, 엄마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나를 키워준 엄마의 모습을 보고도 나는 알지 못했다. 그 세계를 몰랐을 땐, 시끄러운 아이들이 성가셨고 여럿이 모여 정신없는 엄마들을 볼 때마다 괜히 뾰족해졌다. 그런데 내가 겪어보니 그건 타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속 좁은 마음이었다.


언젠가 책에서 엄마는 '나'라는 자아가 사라져 가는 과정을 경험하기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공감했다. 내가 사라져 갈수록 도리어 내가 간절해졌다. 엄마가 되기 전까지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고 반짝이는 존재인지 알지 못했다. 엄마가 되어보니 오히려 아이들만큼이나 나도 소중해졌다. 나를 돌아보고 나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를 따뜻하게 돌보고 싶어졌다. 나 자신을 이제야 돌보게 되었는데, 나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다른 생명을 돌보는 일은, 역시나, 당연히, 힘든 일이 맞다.


괜찮은 줄 알았던 나는 알고 보니 괜찮지 않았다. 세상에 힘들다는 말들이 너무나 많기에 그냥 가만히 삼키려고 애쓰곤 했다. 말한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고 괜한 부정적인 말들로, 예전의 나처럼 '이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눈총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그러려고 애쓸수록 나와 아이들이 속한 세계가 더 외롭고 힘들고 좁아졌다. 무엇이든, 누구든. 솔직한 사정을 알아야 이해하고 이해받을 수 있다. 힘든 건 힘들다고 좋은 건 좋다고 즐거운 건 즐겁다고 표현해야 건강해진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내 아이를 나 혼자 키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엄마도 자신을 돌보며 바깥세상과 어울려야 한다는 것을, 같은 처지의 부모들이 연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가는 요즘이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듯, 아이들 덕분에 극한의 행복과 좌절을 맛보는 하루하루가 돌아보면 다시 못 올 가장 소중한 날들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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