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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ug 18. 2018

나와 같이 사는 상처

그냥 둬요. 적응하면 괜찮아져요.

내 왼쪽 눈동자에는 먼지 하나가 떠다닌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눈앞에 실오라기 같은 게 어른거렸다. 눈을 비비고 씻고 안경알을 닦아보고 인공눈물을 넣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금이 간 렌즈를 낀 것처럼 시야가 답답했다.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싶었는데 몇 주가 지나도 그대로였다.


나는 지독한 근시라서 예민할 정도로 눈에 신경이 쓰인다. 특히 왼쪽 눈은 백내장으로 발전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는 소리까지 들은 터였다. 하필 그런 왼쪽 눈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덜컥 겁이 났다. 지역 카페에서 괜찮은 안과를 검색해 찾아갔다. 이것저것 검사를 받고 나서 비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모기가 날아다니는 것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비문증. 눈을 움직일 때마다 실오라기 같은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시야가 불편한 증상이 나타난다. 유리체에 아주 작은 찌꺼기가 생긴 거라고 의사는 말했다.


"이건 치료할 도리가 없어요. 자연스럽게 없어질 수도 있고 없어지지 않을 수도 있어요."


치료할 도리가 없다는 말을, 의사가 너무나 차분하게 말해서 나는 조금 놀랐다.


"없어지지 않으면 어떡하나요?"

"그냥 둬요. 적응하면 괜찮아져요."


원한다면 레이저 시술을 받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눈에 무리를 줄 수 있다고 했다. 시술받아야 할 정도까지 비문증이 심한 편도 아니고, 고도 근시를 가진 사람들에겐 자주 나타나는 증상이니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의사는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두라니. 이런 무책임한 말이 또 있을까 싶었지만, 진지한 의사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금 제 얼굴 보이시죠? 떠다니는 먼지가 인식되나요?"

"아뇨."

"그럼 괜찮아요. 벌써 적응했네요. 환자분은 비문증이 문제가 아니에요. 안구건조증이 더 심각하다고요."


결국 안구건조증 처방만 받고 병원을 나섰다. 깜박 깜박. 좀 멍청해진 기분으로 복도에 서서 하얀 벽을 바라보았다. 다시 빙그르르 허공을 떠도는 먼지가 보였다. 보려고 마음먹으니 다시 눈앞이 답답해진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괜찮아질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시야에 작은 상처가 났다. 심각한 병 아닐까 걱정했을 땐 눈을 깜박이는 모든 순간이 불편하고 두려웠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혼자 괴로워하기도 했다.


보려고만 마음먹으면 왼쪽 눈동자에 떠다니는 먼지가 보이는 것처럼, 떠올리려고만 마음먹으면 잊고 살았던 나쁜 기억들이 생생히 떠오른다. 작고 많은 나의 상처들. 사소해서 잠시 잊고 지냈던 상처, 너무 오래되어 익숙해진 상처, 예전보다는 덜 아픈 상처, 떠올리기조차 싫어 억지로 봉인한 상처, 불현듯 마주하면 너무 아픈 상처.


일부러 떠올리기 전까지 나는 그것들을 잊고 살았다. 시간이 흘러 깨끗이 나아진 거라고, 잊은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상처들은 그냥 나와 같이 살고 있었다. 약간의 아픔을 감내하고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이름 부르면 불쑥 부루퉁한 얼굴을 내미는 상처들을 껴안고 나는 지금껏 살아왔던 거였다. 아. 나는 상처투성이 존재였구나. 새삼 깨닫는다.


“그냥 둬요. 적응하면 괜찮아져요.”


이상하게도 미덥지 않은 의사의 말이 안심이 되었다. 마음의 상처들도 그냥 두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사실 그렇다. 반드시 모든 상처를 없던 일처럼 깨끗이 지워야만 제대로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기도 거의 불가능하고. 모든 상처를 극복하려 애쓰던 날들, 돌이켜보면 나는 제 상처를 이리 건드리고 저리 건드리며 구태여 아파했던 것 같다. 괜찮아지기 위해서는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는 방법도 있다는 걸 그땐 몰랐다.


힐끔 하늘을 올려다보니, 빵조각을 뜯어놓은 것 같은 구름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었다. 여기에 실오라기 같은 빗금 하나 그어진다 해도 하늘이 하늘이라는 것, 하늘이 아름답다는 것은 변함없다. 그리고 나도. 내가 나라는 것, 여기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변함없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도 내 시야의 상처는 그대로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름의 방식으로 적응할 것이다. 괜찮아질 것이다.


나는 나를 그냥 두기로 했다. 앞으로도 나는 상처투성이로 상처들과 같이 살아갈 것이다.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툭 놓아버리자 어쩐지 유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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