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글방 <마음 쓰는 밤> 세 번째 밤의 기록
<마음 쓰는 밤> 세 번째 밤. 상처받았던 마음을 써 본 시간이었다. 실패와 좌절, 상실과 우울, 실연의 경험들을 되돌아보고 그때를 어떻게 지나왔는지 적어보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고 쓸 수 있었던 글들. 담담한 글이 많았다.
이제는 '아프지 않다, 괜찮다, 유연해졌다, 두렵지 않다'고 고백하는 말들. 이 말들을 뱉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 짐작하기에, 낭독이 끝난 후엔 자주 짧은 침묵이 머물다 갔다. 우리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몇몇 멤버는 자신이 상처 '주는' 사람이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여서 조금 놀랐고, 한편으론 어려운 진심을 꺼내 준 것이 참 고마웠다.
"사실 상처받은 기억을 떠올렸을 때 이 사건 말고는 딱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물론 크고 작은 상처들이 여러 번 있었겠지만 모두 잊어버렸나 보다. 그런데 반대의 것은 끊임없이 생각났다. 아, 나는 상처 주는 데에 더 익숙한 사람이었나 보다."
학창 시절 따돌림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오갔던 어느 멤버의 글이었다. 그저 장난이라고만 생각했던 일. 반대의 입장이 되어 보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따돌림당했던 친구가 얼마나 아팠는지 깨달았다고 했다. 마지막 문장으로 그녀는 고백한다. ‘아, 나는 상처 주는 데에 더 익숙한 사람이었나 보다.’ 이 문장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다.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에서 정이현 작가는 말한다.
"이제는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대인 것만 같다. 예의 바른 악수를 위해 손을 잡았다 놓으면 손바닥이 칼날에 쓱 베여 있다. 상처의 모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누구든 자신의 칼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 시대에 살아가는, 나와 빼닮은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할 수밖에 없다. 쓸 수밖에 없다. 소설로 세계를 배웠으므로, 나의 도구는 오직 그뿐이다."
치고받고 싸우던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까지 마음이 아프진 않았던 것 같다. 쉽게 싸우고 쉽게 화해하던 시절이었다. 어느덧 우리는 예의 바른 어른이 되었고, 어른이기에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오히려 그런 상처가 훨씬 더 아픈 건 왜일까. 손바닥이 칼날에 쓱 베인 나조차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아프게 할 나의 칼날을 생각하기 때문일까. 언제든 나도 상처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기 때문일까.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영화감독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자신을 반성하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사람. 오직 전자의 영화만이 좋아질 수 있다고 했다. 글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는 자신을 반성하기 위해 쓰는 사람의 글만이 점점 좋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성하는 글쓰기는 어렵다.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솔직히 드러내야 하고, 비난과 질타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처 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과거보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기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누군가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그렇게 쓴 글은 힘이 세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한다.
언제나 좋은 사람도 언제나 나쁜 사람도 없다. 나도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다. 무심코 뱉은 말 한마디, 작은 웃음과 눈빛만으로도 누군가를 쓱 벨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베인 상처는 아팠다가 아물었다가 다시 베이기를 반복한다. 상처받았다는 아픔과 상처 주었다는 죄책감을 오가며.
그래도 다행인 건, 우리가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글쓰기는 그런 마음의 상처에 바르는 빨간약이 될 수 있다. 서툴고 투박하지만 도움이 되는 방법이다. 내가 상처 '주는' 사람이었단 걸 인정하는 마음. 오래도록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는 마음. 나의 잘못을 반성하며 글로 쓰는 마음. 나는 그것이 타인을 이해하려는 진실한 노력이며, 상처를 주고받았던 모두에게 바르는 빨간약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