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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Nov 17. 2018

살당보민 살아진다

에세이 작가가 추천하는 에세이 2. 할망은 희망

정신지 작가의 <할망은 희망>. 2018년 4월 3일에 출간된 책입니다. 제주 4.3이 일어난 지 70년이 된 날이기도 하죠. 책 이야기에 앞서, 돌아가신 저희 외할머니 이야기를 잠시 할게요.


외할머니는 제주 해녀였습니다. 그리고 4.3의 피해자였습니다. 4.3으로 가족을 잃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할머니는 그 후 강원도 바닷마을로 이주해 가족을 꾸리고 물질을 하며 자식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그렇게 외할머니 하나로 세상에 나온 사람이 저를 포함한 손주들까지 합쳐서 스물이 넘습니다.


우연히도 저는 외할머니와 같은 제주 고씨입니다. 그리고 제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아무 연고도 없었지만, 하필 그해 제주에 머물렀고 저는 제주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태몽으로 외할머니가 바다에서 따준 커다란 전복을 품에 안고 저를 낳았습니다.


갓난아기일 때 뭍으로 올라와 제주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제주'를 떠올리면 무언가 나를 껴안아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불었던 바람 같은 이야기가 여기까지 불어와 살포시 이마를 짚어주는 기분이랄까요. 바다, 바람, 비, 해녀, 할머니, 이야기. 그래서인지 저는 그런 것들을 좋아합니다.


정신지 <할망은 희망>


"할머니, 할머닌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어요?"
"사람은 죽으면 끝. 다시 태어나면 무엇도 안 되어."
"저는, 사람 말고 큰 나무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는데..."
"나무? 큰 나무는 인내하는 거지. 가지 끊어다가 사람 살리는 거 아니가? 좋은 생각이다만, 다시 태어날 생각 말고 지금부터 그렇게 살라. 그렇게 베풀고 살다보면 부자 되곡 성공헌다. 그리고 결혼은 꼭 해라. 나 하나로 세상에 나온 사람이 스물이라, 손주까지 합쳐서. 인내하며 살다 보면, 다 살아지는 거라. 자신의 그림자만 스스로 잘 만들고 살면 된다. 그리고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하면 절대 안 되는 거. 남의 눈을 주무르는 것이 사람이지,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허민 죄인이라."  

- 정신지 <할망은 희망> 대농 할망과의 대화


방송작가로 일하던 시절, 저는 유독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취재 전화를 걸었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고, 촬영하러 갔다가 할머님들께 동그랗게 둘러싸여 재롱도 부리고 귀염도 받는 날이 많았습니다. 정신지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할머님들께 허물없이 다가가 웃고 떠들고 이야기 듣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한바탕 할머니들 이야기를 듣고 나면 추운 날 뜨거운 국밥 한 그릇을 맛있게 비운 것처럼 속이 따뜻해지고 힘이 차올랐습니다. 할머니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도,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아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물어보지 않죠. 할머니 어떻게 살아오셨어요? 하고.


할망들은 '걷다 보니 뛰게 되고 뛰다 보니 넘어졌다.'는 흔한 좌절과 극복의 라이프스토리를 짧게 줄여 약속이나 한 듯이 단 여덟 글자로 표현하곤 한다. "살당보민 살아진다."  

- '할망들의 라이프스토리' 중에서


책 속에는 일제강점기와 4.3, 그리고 한국 전쟁까지. 어마어마한 비극을 연달아 겪은 보통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다시 삶을 꾸리며 살아왔는지 할망들의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재밌고 신기하고 정겹고 담담하기도 합니다. 할머니가 아랫목에서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처럼 말이죠. 살다보니 살아졌다는 할망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절망도 아픔도 슬픔도 외로움도 도란도란 나누다 보면, 나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느낍니다.


할망의 라이프스토리에는 생명력이 있다. 아니, 모두의 라이프스토리에는 생명력이 있다. ... 평범한 사람들의 감정과 본능, 욕구가 살아 숨 쉬는 사적인 이야기는 주로 대화 속에 존재하는 잡담에 묻히거나 독백으로 간주되면서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모래알처럼 모여 내가 살고 있는 곳의 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해 보자. 수많은 나이테를 가진 나무가 제각각의 속도로 자라나며 숲을 이루어 온 시간을 떠올려 보자. 그러고 있자면 나의 몇 배나 되는 나이테를 가지고 오래도록 이 길을 걸어온 할망이 건네는 깊은 한숨이 가끔 숲 저끝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 '할망들의 라이프스토리' 중에서


<할망은 희망> 할망들의 말


그러나 이제 제주의 할망들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치매라는 병은 전염병도 아닌 것이 동네 노인들 사이에서 하루하루 번져나가' 기억을 잃고 하나둘 세상을 떠난다고 합니다. 어쩌면 평생의 기억이 너무나 버겁고 무거웠던 탓일까요. 저희 외할머니도 하루하루 기억을 잃고 바람처럼 가벼워진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나서야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외할머니의 라이프스토리가 궁금해졌습니다. 할머니가 4.3의 피해자였다는 사실도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엄마에게 물어보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봅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목소리와 말투와 표정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니고 생계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 일을 그저 좋아서, 6년 동안 꾸준히 할망들을 인터뷰해온 정신지 작가에게 고맙습니다. 작가는 멸종 위기에 처한 소수어로 지정된 제주어를 가르치는 일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이 책을 저는 더 많은 사람이 읽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겨우 책 한 권에 불과하지만, 이야기의 두께와 무게는 가늠할 수 없이 묵직합니다. 그리고 조그만 바람을 하나 보태자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신다면, 늦기 전에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suri.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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