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수리 Nov 19. 2018

다은

어떤 상처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내가 생애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은 엄마일 것이다. 당황스럽게도 반대의 기억은 아주 선명한데, 내가 생애 처음으로 미움의 화살을 쏜 것도 엄마였다.


늦은 밤이었다. 잠에서 덜 깨 부스스한 상태로 아빠가 건넨 수화기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내가 사랑하는 엄마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겨우 다섯 살이었던 나는 아빠가 시키는 대로 말했다. “엄마 미워.”라고. 그게 내 기억의 전부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부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던 아빠의 유치함과 치사함에 휘둘린 것이 분하고 억울하다. 나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엄마와 아빠는 그렇게 남이 되었다. 만약 내가 엄마에게 보고 싶다고, 언제 올 거냐고 말했더라면 달라졌을까. 나는 그 짤막한 기억을 오래도록 붙들고 자랐다.


결혼을 앞두고 엄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어느 밤, 문득 그 기억이 떠올라 엄마에게 물었다. 그때 나랑 통화한 거 기억나느냐고. 엄마는 기억난다고 했다. 그때 전화를 끊고 많이 울었다고. 다섯 살 꼬맹이의 말이 진심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렇게 두고 떠난 게 미안하기도 하고, 평생 미운 사람으로 기억될까 봐 무서웠다고. 미움의 화살을 쏜 건 다섯 살 무렵이었는데, 그게 엄마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걸 안 것은 25년이 더 흐르고 나서다.


시간이 흐르고 이제 나도 엄마가 되었다. 아기를 낳고 키우는 건 지금껏 살아본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삶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내 인생에 도돌이표를 찍은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내가 기억 못 하는 아주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이랬을 것 같고, 나를 돌보던 젊은 엄마의 기쁨과 막막함과 고단함이 이랬을 것만 같다. 나로 인해 세상을 얻은 것 같은 기쁨을 느꼈을 테고, 나로 인해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슬픔도 느꼈을 테다.


다섯 살 아이를 두고 떠난 마음을, 그 아이에게 미움받은 상처를, 나는 내 아이의 얼굴을 보며 다시금 곱씹고 아파하고 미안해한다. 지금도 종종 나는 엄마에게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주며 살아간다. 그 말에 상처받는 이는 엄마이기도 하고, 먼 훗날의 나이기도 하다.






<마음 쓰는 밤> 다은님의 글을 공유합니다.

어떤 상처는 도돌이표처럼 나에게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다시 상처를 쏘고, 그것은 먼 훗날의 나에게 도착하겠죠.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suri.see









매거진의 이전글 경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