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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Dec 16. 2018

선미

나의 그림자 아이에게

안녕, 그림자 아이야. 나는 너야. 얼마 전에 심리학 책을 읽고 너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어. 너는 내가 어린 날부터 지금까지 부모님, 친구들, 남자 친구들 등등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먹고 자라난 내 일부라고 하더라. 인사가 늦어서 미안해.


그동안 한밤중에 잠들지 못하고 우주미아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네 탓이고,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이미지도 다 네 탓이라고 하더라. 어쩐지, 누가 프로젝터 빔으로 밤하늘에 영화를 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 그것도 옛날에 겪은 아픔, 슬픔, 우울했던 일만 골라서 틀어주는데, 그게 그림자 아이 네가 한 짓이라는 걸 책을 통해 알게 되니까 잠깐 화가 나더라고. 그리고 너무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바람에 잠을 이루지 못한 날도 많았어. 너무한 거 아니니.


네가 보여준 영화는 크게 세 개의 장르로 구분돼. 엄마, 친구, 애인. 이 카테고리별로 기-승-전-결을 이루는 비극적 이야기를 풀어내. 그리고 엄청 사실적이야.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때 당시 느꼈던 속상한 감정이 다시금 떠올라서 각각의 이야기의 주인들을 원망해.


엄마는 왜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건지, 친구들은 왜 힘들 때만 나를 찾는지, 그 사람들은 왜 마음을 헤집어놓고 떠나간 건지. 그렇게 다 원망하고 나면 더 원망할 사람이 없어서 나 스스로를 원망해. 내 탓인가, 내가 부족해서인가, 내가 능력이 없어서인가. 그렇게 옛 상처 위에 또다시 새로운 상처를 스스로 만들어. 그걸 양분 삼아서 너는 더 무럭무럭 자랐겠구나.


근데 말이지. 너는 환상이고 거품이래. 네가 무기 삼아 보여주는 영화들은 이미 다 지나버린 과거이고 나에게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대. 왜냐하면 난 이제 어른이 되어버렸고 그것 말고도 해결할 문제가 많거든. 그래서 어느 날 또 우주미아가 된 것처럼 그림자 아이 네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면 이젠 이런 생각이 들어. ‘아, 어쩌자고. 저건 지나간 일이고 나는 내일 출근을 해야 해.’


그러다 보면 너는 내가 첫 상처를 받았던 작은 아이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어. 그러면 난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잘 설명해줘. 너의 시간은 잘 지나갔고 난 이제 괜찮다고. 그동안 내 안에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알아봐 주지 못해서, 늦게 발견해서 미안했다고. 그렇게 한참을 설명해주면 너는 사라지고 나는 꿀잠을 자.


사실 며칠 전에도 네가 다녀간 것 같았는데 야근하고 피곤해서 금방 잠들어버렸어. 자주는 안 되지만 가끔은 찾아와. 그땐 팝콘이랑 맥주 마시면서 깔깔깔 전 남친 욕이나 실컷 하면서 밤새 얘기하자. 기다리고 있을게. 안녕!






<마음 쓰는 밤> 선미님의 글을 공유합니다.
당신의 그림자 아이는 어떻게 지내나요? 어떤 심술로 당신을 괴롭히나요? '잊지 마. 나 여기 있어.' 잊을만하면 당신을 콕콕 찔러대는 그림자 아이에게, 한 번쯤은 편지를 써보는 것도,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어차피 우린 평생 함께 살아갈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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