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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Nov 22. 2018

앞치마를 벗다가 울컥했다

내가 싫어했던 엄마의 모습들이 떠올라서

어제는 앞치마를 벗다가 울컥했다. 찰나의 순간에 찾아온 예상치 못한 감정이라서 그냥 꿀꺽 삼켜버렸지만, 내내 그 감정이 떠나질 않았다.


어제 남편과 남동생과 아이들과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바닥에 상을 펴고 치킨을 시켜 먹었다. 각자 할 일을 나눴다. 내가 상을 차리는 사이 남편은 아이들을 돌봤고 동생은 라면을 끓이고 나를 도왔다.


배달음식에 라면이었지만 상차림은 간단치 않았다. 각자의 수저와 접시를 나누고, 음식을 꺼내고 덜고, 아이들 먹을 고기 살을 발라주느라 나는 분주했다. 때마침 설거지하고 있을 때 배달음식이 도착한 터라 주방이 너저분했다. 이걸 놓아두면 저게 보이고 또 다른 게 생각났다. 엄마들은 왜 밥 차릴 때마다 이렇게 바쁜 건지, 나는 괜히 바빴다.


그때 남편이 나를 불렀다. 

"와서 좀 앉아. 앞치마도 벗고."

동생이 말했다.

"누나, 엄마랑 똑같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울컥했다. 대충 걷어 올린 옷소매는 팔꿈치에 구겨져 있었고, 설거지물이 튄 앞치마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손은 기름과 물기로 번들거렸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남편과 동생이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 내가 싫어했던 엄마의 모습. 나는 그 모습을 고스란히 닮아 있었다.


엄마는 밥상이 차려져 있지 않은데도 밥 다 됐다며 우리를 불렀다. 우리가 앉으면 그제야 하나씩 반찬을 옮겼다. 엄마는 자리에 가장 늦게 앉았다. 이제 다 같이 먹으면 되려나 싶은 때, 다시 후다닥 일어나 부엌에서 또 무언가 했다. '먼저 먹고 있어'라는 엄마의 말이 싫었다.


축축한 앞치마를 입은 채로 한쪽 다리를 세우고 앉아 젓가락질하는 엄마가 싫었다. 우리 쪽으로 반찬 그릇을 밀어주고 고기를 발라주는 엄마가 싫었다. 눈치 보듯 후루룩 빨리 밥 먹는 엄마가 싫었다. 자리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설거지를 시작하는 엄마가 싫었다. 엄마의 늘어진 티셔츠도 헝클어진 머리도 정신없는 얼굴도 싫었다. 엄마의 손에 밴 마늘 냄새와 음식 냄새가 싫었다. 그런데 어느새 내가 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엄마, 와서 좀 앉아.' '엄마, 밥 좀 천천히 먹어.'

안쓰러움과 짜증이 뒤섞인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자식이었을 땐. 그런 나는 왜 엄마를 도울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당연히 엄마의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설거지 한 번 도와준 적 없었던 딸이었던 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엄마를 떠올리고 엉엉 울 뻔했다. 미안해서. 너무너무 미안해서.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꿀꺽 삼켰다. 목구멍이 아팠다. 앞치마를 벗고 자리에 앉았다. 다 불어버린 라면을 한 입 먹었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며 나의 가족들이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울기엔 너무 속이 따뜻한 풍경이었다.  







@suri.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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