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첫 번째 여행가방, 그 안에 담긴 것들
우리 엄마가 이렇게나 까다로운 사람인지 몰랐다. 3박 4일 다녀올 여행가방, 캐리어 하나를 사는데 쇼핑몰을 이틀이나 돌아다녔다. 엄마가 사고 싶은 가방은 이랬다. 가격은 너무 싸거나 비싸선 안 되고, 크기는 너무 크지 않아야 하고, 모양은 예뻐야 하고, 색깔은 흔하지 않으며, 바퀴가 튼튼하고 손잡이가 편해야 했다. 엄마는 온 군데 가방가게에 들러 열댓 번쯤 캐리어를 끌고 빙글빙글 가게 안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끝내 마음에 드는 가방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틀 뒤면 떠나야 하는데 시간이 없었다. 엄마에게 이번에는 저렴한 거 하나 사서 다녀오고, 다음 여행 때 좋은 가방을 사는 건 어떤지 물어봤다. 엄마는 안 된단다. 꼭 마음에 드는 가방을 사서 여행 가고 싶다고 했다. "엄마, 캐리어는 예쁜 거 사봤자 소용없어. 수화물 옮길 때 그냥 막 던진단 말이야. 여행 한 번 다녀오면 예쁜 가방도 다 상처나 있는 걸." 엄마는 그래도 한 번만 더 둘러보자 했다. 엄마의 고집에 두 손 들었다.
어디서 또 찾아본담. 둘러보는데 거짓말처럼 가방가게가 보였다. 원래 여성 가방 브랜드인데 50퍼센트 할인으로 캐리어를 꺼내 팔고 있었다. 생각보다 가방들이 싸고 예쁘고 튼튼했다. 마침내 엄마 마음에 드는 가방을 샀다. 튼튼한 하드커버에 모서리가 동글동글한 자주색 캐리어. 엄마가 캐리어를 끌고 앞서 걸으며 "어때?" 물으며 여러 번 뒤를 돌아보았다. 수학여행을 앞둔 여고생 얼굴 같았다. "예뻐. 엄마랑 너무 잘 어울려." 나는 아낌없이 칭찬해 주었다.
엄마는 우리 집에 가방을 들고 와 구석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내가 안 보는 사이에 조금씩 짐을 꾸렸다. 옷도 넣고 신발도 넣고 샴푸와 비누도 넣고 상비약도 넣고. 그러고도 대체 뭘 그리 잔뜩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가방이 터질 듯 빵빵하고 무거웠다. 떠나는 날 아침, 가방을 열어보려 하자 엄마는 안 된다며 뺏어 들었다.
"엄마, 가방이 왜 이렇게 무거워? 어디 이민 가?"
"아니야. 하나도 뺄 거 없어."
"그래도 택은 떼고 가."
엄마는 그제야 상품 택을 떼고 동생과 허둥지둥 떠났다. 돌돌돌. 자주색 캐리어를 끌고서.
엄마의 첫 여행가방이었다. 엄마는 이 가방을 들고 쉰일곱 생애 첫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남동생과 함께 눈의 고장 홋카이도로. 엄마는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고 여행가방을 샀다. 아이들 보느라 함께 가지 못하는 나를 두고 '딸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 첫 해외여행이라 무척 설렐 텐데도 엄마는 떠나기 전날까지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런지 나는 동생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엄마가 누나랑 같이 못 가니까, 미안해서 여행 얘기 일부러 안 하는 거야'라고.
엄마가 우리 집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 엄마도 나도 서로의 마음을 모른 척하느라고 혼났다. 엄마는 다녀와서도 여행이 어땠는지, 얼마나 좋았는지 자랑하기는커녕 여행 사진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나중에 동생이 보여준 사진과 영상 속에 엄마는 예쁘고 행복해 보였다. 이런 거 나한테 자랑해도 되는데. 우리 엄마도 참...
그런데 하루는 엄마가 전화로 고백했다.
"있잖아. 여행 가서 네 모자 잃어버렸어."
"무슨 모자?"
"챙 넓은 모직 모자 있잖아."
나한테 그런 모자가 있었나 생각해보니, 아가씨 시절 홍대 편집샵에서 샀던 모자가 떠올랐다. 몇 번 쓰다가 집안 어딘가에 두고선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런데 그걸 엄마가 찾아서 챙겨갔던 거였다.
"그걸 왜 들고 갔어? 따뜻하지도 않을 텐데."
"그 모자를 쓰고 사진 찍으니까 너무 멋진 거야. 그런데 가자마자 잃어버려서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
"괜찮아. 난 쓰지도 않는 걸. 그럼 홋카이도 어딘가에 내 모자가 있는 거네. 멋진데?"
엄마는 내 모자까지 담아갔었다. 대체 엄마의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었던 걸까. 설렘과 기대, 약간의 걱정과 곱절의 기쁨, 그리고 미안함. 엄마는 첫 해외여행을 함께하지 못하는 딸에게 서운함보다는 미안함이 더 컸다. 내 앞에서 가방조차 열어 보이지 못한 엄마를 생각하면 내가 더 미안하다. 이때까지 엄마랑 여행다운 여행 한 번 다녀오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해서 후회스럽다. 나는 아직도 엄마의 가방에 어떤 짐들이 들어 있었는지 모른다. 그저 짐작할 뿐이다. 아마도 엄마의 마음이 그렇게나 크고 무거웠나 보다 하고.
그나마 내가 잘한 일을 떠올려 본다. 엄마가 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공항에 마중을 나갔었다. 남편과 함께 휴대폰 네온사인 어플로 '명숙아 사랑해' '웰컴 장모님'을 적어서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엄마! 엄마!"
사람들 속에서 요란한 우리를 발견하고 엄마는 수줍게, 그리고 기쁘게 웃었다. 겨우 3박 4일 못 봤을 뿐이지만 나는 엄마를 부둥켜안았다. "엄마, 공항에서는 이렇게 하는 거야." 엄마를 껴안고 마른 등을 토닥였다. 엄마는 비로소 집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안심한 얼굴이었다. 먼 곳에서 무거운 가방을 끌고 돌아와 따뜻하게 안길 수 있는 사람. 나는 엄마에게 언제나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엄마를 끌어안은 채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엄마, 잘 다녀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