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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Mar 07. 2019

이슬

엄마가 떠준 것들은 무겁다

엄마의 옷에는 언제나 실 조각이 붙어있었다. 내게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엄마의 기억은 달그락 요란하게 돌아가는 공업용 재봉 실, 돌돌돌 소심하게 돌아다니는 털 실뭉치. 그 곁에 잔뜩 굽은 엄마의 등. 분주한 손등. ….


젊어서 엄마는 가죽 가방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때, 그 나이 때. 사정이 고만고만한 여자애들이 하는 일이 다 그랬단다. 공장에서 ‘미싱’을 배워 일찍 돈벌이를 시작하고, 남자 형제들의 교육비를 보태는 것. 나도 어느 소설에서 보고 읽었는데, 사실 그게 엄마의 서러운 날들이었다. 엄마는 3남 1녀. 배워야 하시는 아드님 셋, 벌어야 하는 딸년 하나.


누구의 딸, 누구의 누나가 괴롭던 그 애는 어른이 되기도 전에 엄마가 됐다. 누구의 아내와 누구의 엄마로 사는 일도 녹록지 않았던 그녀가 겨우 쥔 취미 하나. 그 유일하고 소박한 취미는 뜨개질이었다. 그마저도 식구들의 목도리나 장갑, 모자, 스웨터 같은 것들을 떠서 몸에 가져다 대는 일. 삼복에도 털실을 껴안고 부지런히 떠서 겨울이 되면 하나하나 꿰어 입힌다.


나는 그게 좀 지겹다고 생각했다. 또 실이야? 재봉 실로도 모자라서 털실 조각까지 붙이고 다니겠다고? 형제들을 먹이던 재봉틀도 싫고, 식구들을 입히는 뜨개질도 나는 싫다. 누구의 무엇으로 밖에는 살 줄 모르는 그런 엄마도 싫다.


엄마가 떠준 것들은 무겁다. 정말 돈 주고 사는 것보다 무게가 무겁기도 하고. 그것들을 받아드는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당최 한 코 한 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담아 꿰어 내는 건지. 엄마의 굽은 등은 얼마나 많은 말들을 그 속에 쏟아 넣고 있는 건지. 나는 그 모든 게 무겁다. 그래서 때마다, 뭐 하나 떠줄까? 물으면 나는 단번에, 아니. 한다. 아니, 싫어, 무거워.


그렇게 자라면서 나는 엄마가 만든 촘촘한 뜨개물에서 벗어났다. 대신 성기게 짜인 싸구려 목도리를 해마다 바꿔 맸다. 그 목도리는 아주 가볍다. 가볍게 유행을 타고, 한 철 쓰고 나면 쉽게 올이 풀리고, 계절도 지나고 유행도 지나면 나는 미련 없이 그것을 버린다. 사실 더 두르기 민망할 정도로 상해버리곤 하니까. 그리고 다음 해에는 또 새 목도리를 산다.


그렇게 몇 개의 엉성한 목도리를 지나온 어느 겨울, 엄마가 별안간 인형 하나를 내밀었다. 털실로 짜인 곰인형. 철렁, 했다. “엄마가 떴어. 인형은 처음 뜬 거야.” 그걸 받아 들으면서 나는 어쩔 줄 모른다. 나는 그 애를 어쩌질 못한다. 침대에 무심히 던져뒀던 애를 바닥에 떨구고 자다가도, 도로 주워서 대충 껴안고 잔다. 다시 깨어나면 그 애는 처참한 꼴로 발밑에 처박혀있다. 그 애는 내 방에 자리가 없다. 그래서 여기저기 굴러다니다가도 마음이 무거워지면 데려다가 의자에 앉혀놓고, 침대 구석에 앉혀놓고 한다.


엄마의 것들이 그렇다. 뭔가 미안한 마음에 질려도 쉽게 버릴 수 없고, 촘촘하게 짜인 엄마의 것들은 눈치도 없이 잘 상하지도 않는다. 계절도 유행도 쉽게 지나는데 그것들은 아무리 지나도 여전히 묵직하고 다부지다. 내 방에는 그것들의 자리가 없어서, 여기저기 떠밀리기만 한다.


재봉틀과 뜨개질. 언젠가 피할 수 없는 부재의 시간이 오면 이 두 가지가 내게는 영영 엄마일 것 같다는 슬프고도, (아이러니하지만) 어쩐지 다행인 예감이 들었다. 언젠가 지은씨가 지은씨만의 지은씨로 가벼워진 후에도, 내겐 무조건적인 나의 엄마가 영영 남아 있을 거라는. 어느 오후, 부지런한 엄마의 손등 위로 햇살이 감싸 안던 시간. 순간이기에 더 아름답던 순간에.


젊어서도 나이 들어서도 엄마는 부지런하다.

어려서도 나이 들어서도 엄마의 그늘 아래 나는 게으르고.






<마음 쓰는 밤> 이슬님의 글을 공유합니다.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본 적 있나요? 그녀의 굽은 등이 무슨 말을 하고 있던가요. 짐작해본 적 있나요. 굽은 등이 끌어안은 말들을 헤아려 보고 싶은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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