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수리 Mar 22. 2019

다복

마지막 날 고백했듯, 엄마의 딸이어서 좋았어

엄마가 사랑하는 봄이 오고 있어. 봄이 오면 얇은 니트에 카디건을 걸치고 파스텔 스카프를 두르곤 했잖아. 벚꽃 같기도 하고 목련 같기도 해서 아름다웠지. 나는 그 모습이 꽃처럼 소담하여 여기저기에 자랑을 하고 싶었어.


엄마가 골라주는 옷을 입고 엄마가 권하는 가방을 들고...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도 좋아했지. 엄마는 내가 엄마랑 취향이 비슷해서 다행이라고 쇼핑을 할 때마다 흡족해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우.


엄마는 미처 몰랐겠지만, 나는 빈티지한 것들을 더 좋아해.

원피스보다는 바지가 좋고, 하늘하늘한 실크 스카프보다 둘둘 맨 면 스카프가 편해. 그럼에도 아직도 나는 매대에 널브러져 있는 파스텔 색깔의 실크 스카프를 보면 눈을 못 떼고, 여전히 잘 입지도 않는 원피스를 사서 옷장에 걸어 둔다우.


엄마가 떠난 가을엔 바닥을 구르는 낙엽이 미웠는데, 엄마가 사랑하는 봄이 오니 자꾸 잠을 설치며 긴 밤을 보내게 되네. 밤이 너무 까맣고 긴 날은 꼬깃꼬깃하게 서랍 속에 재워둔 엄마의 도시락 편지를 꺼내 봐. 아직도 그 편지들이 노란 단풍처럼 바래지지 않고 그곳에 있는 걸 확인하면 마음이 놓이거든.


어릴 때 엄마는 나한테 편지를 써주는 유일사람이었어. 학교에서 급식을 시작했던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엄마가 싸준 도시락 안에는 언제나 작은 쪽지 편지가 들어 있었지. 친구들은 햄과 소시지로 가득한 내 도시락보다 노란 엄마의 편지를 더 부러워했는데, 나는 그런 친구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항상 도시락 뚜껑을 천천히 열었어.


솔직히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내용은 별것 없었잖아. 대부분 아침에 신경질 내고 나온 나를 타이르거나, 공부 열심히 하라는 당부, 반찬 투정이라든지 옷 타박 같은 것은 바른 학생의 자세가 아니라는 윤리 교과서 같은 엄마의 잔소리였지. 그런데도 나는 늘 말미에 “오늘도 너를 사랑하는 엄마가”라는 문구를 읽고 나면 해사하게 피어나는 기분이었어.


엄마는 꼭 바라지 않았지만, 나는 가끔 채무를 갚는 것처럼 답장을 했지. 식탁 위에 몰래 편지를 놓아두고 나온 날은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신기하게 엄마가 문을 열고 나와서 나를 꼬옥 안아줬어. 그 품은 어찌나 뜨겁던지.  


지금도 내 서랍 속에는 여전히 빳빳한 엽서와 카드와 편지지들이 가득 모아져 있어. 물론 이제는 갈 곳을 잃어 동면하고 있지만. 가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편지지를 한참 들여다보곤 하는데, 어쩐지 나를 닮은 것 같아 가여워.  


우리가 같이 주말 산책을 하고, 성당을 다녀오고, 장을 보고, 커피를 마시고, 쇼핑을 하던 곳을 나는 며칠 전에 떠났어. 그 동네에 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지만, 떠나기가 쉽지 않았어. 마치 엄마를 두고 오는 것 같았거든. 하지만 이젠 알아. 공간은 오래전에 무의미해졌다는 것을. 엄마와의 시간을 내 가슴에 묻었으니까.  


이사를 하면서 엄마 생각이 많이 났어. 비교적 무탈하게 이사를 했지만, 나는 종종 버거워서 혼자 차 안에서 울음을 터트렸어. 혼자서 대소사를 처리했던 엄마도 고작 내 나이 또래였을 텐데. 엄마는 그날들을 어떤 마음으로 견뎠을까.


이제 나는 엄마를 따라 하기 바쁘던 소녀를 벗고, 나로 살아가기 시작했어. 내가 좋아하는 옷들을 사 입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공간을 꾸미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살아가. 이제야 숨이 쉬어지는 기분인데, 우습게도 그 속에서 프라이팬 바닥에 녹아든 버터처럼 엄마의 흔적을 보곤 해. 


그럴 때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하하. 내 기반에 엄마의 것들이 코팅되어 깔려 있는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알아? 그래, 맞아. 엄마를 많이 좋아했어. 나는 그 마음을 충분히 표현했을까.


엄마의 마지막 날 내가 고백했듯, 엄마의 딸이어서 좋았어. 그리고 살아가면서 내가 엄마 딸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종종 해. 덕분에 나는 잘 큰 것 같아. 앞으로 내 안의 엄마를 기억하면서, 엄마가 살고 싶었던 생들의 끝을 아련히 느끼면서,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건강하고 멋스럽게 나이 들어갈게.


엄마, 고마워.

엄마, 미안해.

엄마, 사랑해.







<마음 쓰는 밤> 김다복(필명)님의 글.

엄마의 글씨를 기억하나요? 엄마와 손편지를 나눈 적이 있나요? 매일 도시락통에 손편지를 넣어준 엄마와 밤이 너무 까맣고 긴 날이면 엄마의 편지를 꺼내보는 딸. 이제는 곁에 없는 엄마의 글씨를 바라보는 마음은 어떠할까요.


'부치지 못한 편지의 우체부가 되어 주세요'라는 제목의 메일로 다복님의 글을 받았습니다. 정작 다복님의 어머니는 이 편지를 읽지 못하셨지만, 대신 많은 사람이 이 편지를 읽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마다의 마음속에 소중한 누군가를 떠올리며.



매거진의 이전글 이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