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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Jul 25. 2015

토요일의 리틀 포레스트

장마에 지친 토요일, 그녀의 힐링 무비

빨래가 마르지 않는다. 눅눅한 빨래에서 불쾌한 냄새가 났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빨래 건조대 앞에 쪼그려 앉은 채 창밖을 쏘아보았다. 기분 나쁜 장마였다. 뿌연 대기,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이건 비라기보단 세상을 습하게 더 습하게, 마구 습기를 뿌려대는 것 같다. 개운하게라도 내리면 좀 좋아, 요즘 날씨 정말 너무하네. 나는 심통이 났다.


아, 이런 날엔 보일러나 절절하게 틀어두고 빵이나 굽고 싶다.


이 더운 날에 웬 보일러 타령이냐고. 바로 영화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2014) >에서 보았던 극한 장마 대처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리틀 포레스트>는 내가 보석처럼 아끼는 소중한 영화이다.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과 매부리코가 매력적인 배, 하시모토 아주인공 이치코 역을 맡았다. 


영화는 작은 시골 마을 코모리에 사는 이치코의 일상을 보여준다. 농사짓고, 요리하고, 먹고, 가끔 과거를 회상하는 게 전부다. 잔잔하지만 눈을 뗄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엔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영화는 이치코의 내레이션과 함께 장마철 마을 풍경을 비춰주며 시작한다. 내게는 손꼽히는 베스트 오프닝이기도 하다.




"코모리는 토호쿠 지방의 작은 마을이다."



"고개에 올라 내려보니 코모리는 수증기에 잠겨 있었다. 땅이 머금은 수증기가 힘차게 증발하고 있다. 코모리는 분지 밑바닥, 산의 수증기도 흘러들어 간다. 습도가 점점 높아진다." 



"젖은 셔츠처럼 달라붙는 대기

습도 100퍼센트에 가까운 공기의 저항감

지느러미만 붙이면 헤엄칠 수 있을 것 같다."


<리틀 포레스> 이치 내레이션


정말로 손에 물갈퀴를 달고 지상으로 뛰어들어 헤엄치는 이치코의 판타지.

도입부일 뿐인데도 당신은 이미 이 영화의 분위기에 홀딱 반했을지 모른다.


이치코가 사는 코모리는 분지의 밑바닥에 위치한 마을이라서 여름엔 엄청나게 습하고 덥다. 입은 셔츠는 땀에 젖어 온몸에 달라붙고, 며칠을 말려도 빨래가 마르지 않는다. 어느 날, 이치코는 잼을 만들던 에 까만 곰팡이가 핀 것을 발견하고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집안의 모든 문을 닫고, 장작을 가득 넣은 스토브에 불을 지핀다.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른다. 뜨거워진 방. 이치코는 빵을 만들기 시작한다.

고온 고습은 발효에 딱 좋다. 빵을 만들기에 최고의 환경이다. 이치코는 송골송골 땀을 흘리며 반죽을 시작한다. 통밀가루와 이스트를 만든 반죽은 천천히 숙성시킨다. 숙성된  형태를 만들고 칼집을 낸다. 제법 모양이 잡힌 반죽은 스토브가 꺼지기 직전에 넣어 굽는다. 빵 굽는 온도로는 이때가 딱 적당하기 때문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스토브를 열어 빵을 꺼낸다. 드디어 완성된 빵. 집안도 뽀송뽀송해졌다.

이치코는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빵을 들고는 창밖을 쳐다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장마 따위에 질까 보냐


이치코는 영화 내내 조용하고 차분하다. 굴곡 없는 표정과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마치  마리의 고독한 고양이같이 살아간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잠시 드러난 이치코의 까칠함, 털을 바짝 세우고 갸르릉 대는 앙칼진 고양이처럼 아주 매력적이다. 나는 박에 이치코 반해렸다. 


<리틀 포레>에서  아름답다. 하지만 결코 너그 않다. 습하고 더운 날씨, 우후죽순으 뿌리를 뻗는 질긴 잡초들, 밤이면 코의 집으로 달려드는 온갖 벌레와 야생동물, 조금만 틈을  날씨와 해충에 먹혀 죽어버리는 작물들. 깡마른 여자  그것들을 어떻게 헤쳐나갈까 싶지, 이치코 입을 다물고 살아나간다. 주어진 환경을 이용하거나, 상상하거나, 견디면서. 어쨌든 터프한 하루를 살아낸다. 고생스러운 그날의 수확물로 정성껏 요리하고 맛있게 먹는 것이 이치코에겐 행복이다.   


장마 요즘처럼 불쾌기는 처음이다. , 날씨는 예전 이맘때와 비슷한데  꼬여버린 .  마음 롭고 나쁜  끈질기게 들러붙어   녹다운시킨다. 내가 며칠째  빨래 앞에서 좌절 즘처. 

하지만 화를 내서 무얼 하나.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천하무적 기세 등등한 장마 앞에서 주저앉아 짜증만 낼 순 없었다. 읏챠! 나는 무릎을 털고 일어나 잠시 보일러를 돌리기로 했다. 집안의 모든 문을 닫고, 때아닌 보일러를 돌린다. 금세 뜨거운 기운이 올라온다. 습한 공기가 말라가고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나는 '장마 따위에 질까 보냐' 이런 씩씩한 자세로, 전투적인 생의 의지로!


오늘 뽀송뽀송한 빨래를 개고야 말 테다.
오늘 맛있는 음식을 해 먹고야 말 테다.
오늘 기어코 행복하고야 말 테다.


뜨거운 방바닥을 총총 걸어가며 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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