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글방 멤버들과 어떤 마음일 때 글을 쓰는지 이야기 나눴다. 대부분 우울할 때 슬플 때 글을 쓴다고 했다. 나도 그럴 때 글을 쓰는 사람이다. 마음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마음이 노랑일 때보다 회색일 때 쓰는 사람. 샛노랑 마음도 쓰고 싶지만, 순간의 기쁨에 취해 터무니없는 긍정과 자랑을 늘어놓는 글이 될 것 같아서. 나는 기쁠 때조차 한 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글을 쓴다. 물론 샛노랑의 마음을 즐겁게 풀어놓는 작가들도 많다. 그런 맑고 밝은 에너지가 좋다. 부럽다. 하지만 나는 그게 안 되는 사람이다. 그래서.
댄싱스네일 작가의 <게으른 게 아니라 충전 중입니다>를 읽었다. 노랑 빨강 파랑 초록. 명랑한 색깔로 그린 그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작가가 우울함과 무기력을 경험하던 시기에 그린 그림들이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를 듣는 느낌이었다. 명랑하고 산뜻한 그림들은 우울하지만 따스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런데 그 위로가 식상하지 않다. 아파본마음에서 건져 올린 조심스러운 말들이라서. 작가만의 색깔로 말투로 건넨 말들이라서.
작가도 마음이 회색일 때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나는 운이 좋게도 초창기 브런치에 연재할 때부터 댄싱스네일 작가의 작품들을 찾아 읽었다. 명랑하지만 서늘한 그림과 예상치 못한 깊은 글에 찌르르 마음이 울릴 때가 많았다. 도무지 잡히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한 시간을 겪어보고 그 밑바닥에서 느낀 것들을 정돈한 글과 그림들. 몇 컷에 불과한 그림들이지만 무얼 그릴지 생각하고, 짙은 감정들을 덜어내고 고치고, 그림 속에 진심을 숨겨두는, 작가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날로 돌아가, 우리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한 멤버가 말했다. "조금 마음이 아프네요"라고. 행복보단 불행에 가까운 글과 책들, 그리고 회색의 마음으로 글을 쓰는 우리들을 두고 말한 진심이었다.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프지만, 우울하고 슬픈 마음으로 글 써도 괜찮다고. 그렇게 글로 쏟아내도 괜찮다고. 노랑의 마음은 가까운 사람에게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회색의 마음은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털어놓기 어려우니까. 혼자라도 글 쓰며 견뎌내도 괜찮다고. 지금 우리가 쓰는 문장은 미래의 문장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쓴 글들이 초고가 되었다. 아프던 시기를 지나 돌아보고 다듬어 고쳐 썼다. 그렇게 두 권의 책을 썼다. 회색의 마음으로 쓴 나의 글들이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순간을 자주 만난다. 작가로서 그때가 가장 뭉클하다. 몰랐는데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미래의 책을 쓰고 있었다. 위로의 책을 쓰고 있었다.
김연수 작가는 우리가 지금 읽는 책들은 현재의 책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우리가 쓰는 문장들도 그렇다. 미래의 나와 당신,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조금 마음은 아프지만, 시간은 흐르고 너는 자라서. 훗날 너의 우울과 불행과 슬픔과 아픔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도 할 거라고. 지금도 미래의 책, 위로의 책을 쓰고 있을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