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수리 Jun 13. 2019

어떤 이야기가 아름답게 시작된다는 것은

글 쓰는 할머니들과 보낸 시간

<인생 스케치북 프로젝트> 어제의 풍경. 가장 먼저 도착한 교실에서 홀로 글 쓰는 할머니. 고요한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한참 바라보았다. 쉬는 시간에 공책을 봐도 되겠냐며 할머니 옆자리에 앉았다. 공책에는 똑같은 글들이 여러 장 적혀 있었는데, 자기 글씨가 부끄러워서 몇 번이나 똑같은 글을 깜지처럼 공책에 적으셨던 것이었다. 꾹꾹 눌러쓰고 줄 긋고 덧쓰고 다시 쓰고. 큼지막한 글자들이 힘주어 적혀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말씀드렸는데 할머니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사실은 고수리 작가님 책을 사서 읽었어요.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감사해요. 그런데 그 책 활자가 너무 작아서 읽기 힘드셨을 텐데요."

"돋보기안경 쓰고 열심히 읽었어요. 작가님 정말 잘 자랐어요. 대견해요."


그러면서 등을 토닥여주시는 것이었다. 눈시울까지 붉히시며.

나도 덩달아 울컥해서 혼났다. 나는 정말 작가 하기 잘했단 생각을 했다.



다른 선생님들도 성실히 열심히 글 써오셨다. 먼저 세상을 떠난 단짝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 60년 넘게 불린 나의 이름에 대한 생각, 돌아가신 엄마가 만들어주었던 음식들에 대한 추억, 30년 넘게 살아온 집의 풍경. 그동안 써온 11편의 글을 다듬어 프린트해서 원고처럼 가져온 선생님도 계셨다. 합평 시간이 제법 익숙해져서인지, 서로의 글에 감탄하고 칭찬하고 격려해주며 오고 가는 이야기들이 차고 넘쳤다. 선생님들은 아주 작은 것들까지 발견하고 감응하는 능력을 가지셨다. 그 능력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안다.    


마지막 글쓰기 수업이었다. 수업을 마치자 선생님들은 나를 둘러싸고 안아주고 손을 꼬옥 잡아주시며 말씀하셨다. '수리수리 고수리 작가 못 봐서 어쩌지. 덕분에 글을 써보고 싶어 졌어요. 용기를 심어줘서 고마워요. 심심하면 매주 놀러 와요.' 건네주시는 마음이 고마웠다. 모쪼록 선생님들이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건강히 웃고 울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책 만들고, 건강하게 잘 해내셨으면 좋겠다. 선생님들이 쓰고 그린 '인생책'으로 올해 말 출간 기념회를 열 예정이라는데 꼭 참석하고 싶다.


어떤 이야기가,
어떤 인생이,
어떤 시작이
아름답게 시작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 진은영.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


선생님들과 세 번의 만남. 올해 첫날 적었던 문장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 느껴본 시간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쓰고 읽고 나누는 삶에 감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