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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Jun 20. 2019

은별

높은 마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오늘은 좋은 날이에요. 숙제 같던 일들도 생각보다 일찍 마무리 지었고 책도 읽었고 아침, 점심, 저녁까지 삼시 세 끼를 꼬박꼬박 다 챙겨 먹었으며 그 와중에 낮잠까지 잤으니 말이죠. 더없이 좋은 건 삼개월간 나를 괴롭히던 구내염이 이제 좀 잠잠해졌다는 거예요. 이 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맥주 한 캔을 집어 들고 우리 집에서 볕이 제일 잘 드는 창가에 앉았어요. 솔직히 이 표현은 의미가 없어요. 지금은 23시 48분, 비 내리는 밤이기 때문이죠. 


햇볕 대신 간판의 네온 불빛만이 쏟아져 들어와요. 네온은 공기를 이루는 기체 중 하나로 전류가 흐르면 불빛을 내는 성질이 있어서 간판, 전광판 등에 많이 쓰인대요.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넌 먹을 때 제일 예뻐’ 뭐 이런 곳에요. 생각나는 예가 이런 것뿐이라 갑자기 우울하네요. 


네온에 관해선 분명 정규교육과정 중 어디선가 배웠을 내용인데 임용고시를 앞두고서야 정확히 인지했어요. 이래서 사람은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하나 봐요. 공기 없이는 단 5분도 못 버티는 나약한 존재이면서 공기를 이루는 것들에는 이리도 무지하다니, 때로는 얼마나 간사한지 몰라요. 하기야 차지하는 정도가 0.00182% 밖에 안 된다는데 알게 뭡니까. 근데 갑자기 서글프네요. 저 네온이 나 같아서. 아니 내가 저 네온 같아서. 반짝반짝 빛 좀 내보겠다고 아등바등거리는데 발에 치이는 게 전광판이고 간판이네요.

 

요즘 즐겨 듣는 음악 중에 ‘아무도 찾지 않는 연극, 그 속에서도 조연인 내 얘기(는)’이라는 가사가 있어요. 가사 한 번 못 됐죠? 아무도 찾지 않는 것도 쓸쓸한데 주인공도 아닌 조연이라뇨. 요 몇 년 내가 딱 그랬어요. 누군가를 잃어버린 뒤로 아무도 찾지 않는 연극 속 조연이 되어버렸죠. 


사람이 조연만 하다 보면 주인공을 시기질투하게 되는 거 아시죠? 그런 뻔한 클리셰가 내 삶에서도 얼마간 반복되었죠. 그게 사람을 되게 치졸하고 치사하게 만든다는 것도 아시죠? 치졸하고 치사한 내가 싫어서 고량주 한 병을 혼자 털다 골로 갈 뻔한 적도 있고요, 술기운에 잃어버린 누군가에게 연락했다가 두고두고 후회한 적도 있고요. 


이러다 내가 지쳐 죽겠다 싶어서 조금 웃긴 얘긴데, 신점을 봤어요. 무슨 무병도 아니고 갑자기 신점이라니 전개가 뜬금없는데 전 원래 그런 걸 좋아해요. 평범한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으신 무당이 들어서는 날 보며 다짜고짜 ‘24!’라고 외쳤어요. 나중에 그러더라고요.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 24명이 보인다고. 그때 우리 반 애들 숫자가 정확히 24명이었으니까, 이미 들어선 순간부터 난 그분을 신봉했을지도 몰라요. 


근데 이제 생각해 보니 다 뻥이었어요. 그 무당 말이 맞았으면 난 지금쯤 애 하나 끼고 육아휴직 중이었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 무수한 뻥 중에 대문을 나서는 내 뒤통수에 대고 그분이 그러셨어요. “할아버지가 그러시는데 당신은 글을 써야 한대.”

   

그것도 벌써 몇 년 전이네요. 요즘 그때 신할아버지 말씀만은 뻥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까 즐겨 듣는다는 그 노래요, 그 부분에서 이어지는 가사가 참 좋거든요. ‘아무도 찾지 않는 연극 그 속에서도 조연인 내 얘긴 그래도 조금은 나 특별하고 싶은데 지금 그대와 같이 아름다운 사람 앞에선 높은 마음으로 살아야지 낮은 몸에 갇혀있대도’ 전 여기 ‘마음 쓰는 밤’에 와서 여러분들 덕분에 비록 낮은 몸에 갇혀있대도 높은 마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글이라곤 초등학교 때 억지론 쓴 일기가 전부인 내가 여러분이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을 담아 쓴 글 덕분에 글을 쓴다는 게 참 멋진 일이구나 해요. 글을 쓴다는 건 전류 같은 거 흘려주지 않아도 사람을 스스로 빛날 수 있게 해주는 일이구나 해요. 미세먼지 많은 날 기어코 나가서 몰래 축구하고 돌아온 애들한테 냅다 잔소리 한 바가지 하고 싶다가도 난 아름다운 사람들이랑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좀 더 아름답게 잔소리해야지 해요. 


그렇게 여러분, 정확히는 여러분의 글 덕분에 높은 마음으로 살고 싶다는 꿈을 꿉니다. 마지막 밤이 끝나면 우리는 또 모르는 타인으로 돌아가 각자의 평범한 일상을 살겠죠. 오래오래 지금과 같이 마음을 담은 글 많이 써주시길 바라요. 덕분에 행복한 밤입니다. 





<마음 쓰는 밤> 서은별님의 글. 


"글을 쓴다는 건 전류 같은 거 흘려주지 않아도 사람을 스스로 빛날 수 있게 해주는 일이구나 해요." 


마지막 밤에 참석하지 못한 은별님이 보내준 글을 뒤늦게 읽었어요. 다른 멤버들에게 이 글을 읽어주지 못한 게 너무나 미안했지요. 좋은 에세이는 '어? 이거 내 마음인데, 내가 하는 생각인데, 내가 쓴 것 같은데.' 그런 글 아닐까요. 이 글이 그랬어요. 나도요. 나도 그런 생각을 해요. 여러분의 글 덕분에 높은 마음으로 살고 싶다고. 은별님 손 꼭 잡고 힘껏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습니다.


무당은 아니지만 제가 예언하나 할까요. 꾸준히 쓰는 한 당신은 책을 낼 거고요. 저는 그 책을 읽을 거예요. 은별님, 세 달 동안 마음 써주셔서 고마웠어요. 덕분에 나는 최초의 독자가 되어 마음껏 울고 웃었답니다. 오늘 밤의 비지엠은 9와 숫자들 '높은 마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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