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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pr 24. 2019

너의 기억은 나의 기억을 구긴 것이다

나는 기억한다, 내가 들어있는 너의 기억을.


나는 기억한다, 맨발로 어린이집을 몰래 도망쳐 나왔던 날을.

너는 기억한다, 진돗개마냥 자꾸만 집으로 돌아오는 너의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무서워했던 날을.


나는 기억한다, 카센터에서 정비를 마친 아빠가 나를 두고 혼자 집으로 가버린 것을. 

너는 기억한다, 부모라는 것을 문득 잊어버린 날을. 그리고 또 화장실이 얼마나 급했는가를.


나는 기억한다, 병원에 입원 중이던 나에게 외삼촌이 시계 보는 법을 가르쳐줬던 것을. 시곗바늘이 지루함을 반죽하고 있었다.

너는 기억한다, 누나 등쌀에 데이트를 제쳐놓고 일곱 살 조카 병문안 갔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물에 불려둔 사료가 뜨거울까 봐 한 알 씹어보았던 것을. 

너는 기억한다, 믿었던 이가 너의 밥을 탐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결혼하자는 너의 말에 집에 가고 싶어 졌던 날을.

너는 기억한다, 결혼하자는 너의 말이 모든 걸 끝내버렸던 날을.  


나는 기억한다, 외할머니의 마지막 밤을. 그 앞에는 두 딸이 서 있다 한 딸만 남게 되었다. 엄마가 입고 있던 딸이라는 옷은 외할머니와 함께 타버렸다.

너는 기억한다, 쉰일곱에, 겨우 쉰일곱에 고아가 되어버린 날을.


나는 기억한다, 나의 기억은 너의 기억을 펼친 것이고 너의 기억은 나의 기억을 구긴 것이다. 







<마음 쓰는 밤>  '민'님의 글. 

나는 기억한다. 너는 기억한다. 하나의 순간을 두 사람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나의 기억과 당신의 기억은 어떻게 달랐던 걸까요. 때론 오해가 사랑이었고, 사랑이 이별이었던 순간들. '나의 기억은 너의 기억을 펼친 것이고 너의 기억은 나의 기억을 구긴 것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돌아본 후에야 밀려드는 후회 같은, 아쉬움 같은 그런 이상한 마음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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