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6시, KBS FM '세상의 모든 음악'을 켰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밤 껍질 까기, 나물 다듬기 등은 주로 이 시간에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즐겨한다.
며칠 전에 넣어둔 달래를 냉장고에서 꺼내 다듬기 시작했다. 달래는 뿌리 부분에 얇게 말라붙은 갈색 겉껍질을 벗기고 혹을 떼어낸다. 뽑은 지 며칠 지난 것은 겉껍질 속 연미색 속껍질도 한 번 더 벗겨내야 한다. 달래 모양이 옛날에 먹던 것과 많이 다르다. 자연산 달래는 좀 더 통통하고 길이가 짧고 향이 강했는데, 지금 다듬는 달래는 길이가 30cm 가까이 되고, 잎이 가늘어 이불 꿰매는 실 굵기만큼 가는 것도 있다. 그러다 보니 달래 한 줌 다듬는데 한 시간도 더 걸렸다.
달래를 다듬고 있자니 어머니 생각이 난다. 이십여 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이사를 왔을 때다. 산기슭에 있는 집이다 보니 주변에 더러 노는 땅이 있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부탁해 묵정밭을 하나 얻으신 어머니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늘 밭에 나가셨다.
흙에 박힌 많은 돌과 고목나무 등걸을 패어내고 씨앗을 뿌렸다. 주로 배추 무 상치 토란 등을 심으셨다. 새싹이 겨우 손가락 한 마디만큼 자랐을 때 한 바구니를 솎아 오셨다. 우리 식구 먹을 만큼 덜어놓고 나머지는 아랫집 줄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하나 뿌리를 제거하고 떡잎도 떼어내느라 시간이 아주 많이 걸렸다. 내가 답답해서 '남 주는 것 그냥 주면 되지 뭘 일일이 다듬고 계세요?'라고 말하니, 어머니는 '요새 젊은 사람이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일을 하겠느냐?'고 하시며 한나절을 다듬어서 한 바가지 갖다 주셨다.
예닐곱 살 쯤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시골장터에서 가까운 큰 길가에 있었는데, 장날에 아이들이 떠들썩하게 몰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미친년(그땐 여자 정신질환자를 다들 그렇게 불렀다)을 따라가며 구경하고 있었다.
40대 중반쯤 된 그녀의 옷은 다 해지고 때가 묻어 더러웠다. 머리는 감지 않아 떡이 져 있었다. 장터 입구에 있는 국밥집에 구걸하러 들어가자, 주인이 장작개비를 들고 뛰어나와서 큰소리로 욕을 하며 쫓아냈다.
저녁 무렵, 어머니는 가마솥에 흰쌀밥을 짓고 선지를 넣어 우거지 국을 끓이다가, 밖에 미친 여자가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는 집으로 데리고 들어오셨다.
그를 부엌의 따뜻한 아궁이 옆에 앉히고, 나물 무치는 큰 양푼에 밥을 넉넉히 퍼서 국을 말아 한 그릇 먼저 떠주셨다. 선짓국은 어머니가 어지럼증이 생겨 끓인 것으로, 우리 식구들에게도 특별한 음식이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어머니가 천사 같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KBS 라디오 어린이 프로그램 방청권을 서너 장 가져와서 원하는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토요일 방과 후 방송국에 가면 <누가 누가 잘하나> 노래 경연과 <무엇일까요?> 퀴즈 프로그램을 녹음했다.
그때는 방송국이 서울시청 뒤에 있었다. 집이 삼선동이었던 나는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어려운 형편인데도 어머니는 '많이 다니며 봐야 배울 수 있다'며 매번 교통비를 챙겨주셨다.
고등학교 때도 다 큰 딸의 운동화를 빨아 주시며, '이런 거 할 시간에 영어단어 하나라도 더 외워라'라고 하시던 어머니. 새로 지은 따뜻한 밥은 항상 자식들 주고 자신은 매번 찬밥을 드셨다.
몇 년 전에는 고로쇠 물이 몸에 좋다고 해서 사서 마셨다. 다음 해에 다시 주문하려 하니, '나무가 언 땅에서 힘들게 길어 올린 수액을 뺏어 먹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며 못하게 말리셨다.
올해 94세인 어머니는 침실에서 거실로 나와 앉는 데에도 가쁜 숨을 몰아쉰다. 그런데도 어디 아픈데 있느냐고 물어보면 없다고 하신다. 필요한 것 없느냐고 여쭈어 봐도 '끼니때 되면 밥해주고, 따뜻한 방에 잘 수 있고, 입을 옷 있으니 부족함이 없다'라고 손사래를 치며 활짝 웃으신다.
70년이 다 되도록 함께, 또는 가까이에서 살았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내가 딸이라고 차별 대우하지 않으셨다. 자식들에게 큰소리로 야단치거나 욕설하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다. 손이 많이 가는 멸치를 다듬거나 도라지 껍질을 깔 때면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언제나 내가 하는 말을 믿고 지지해주신 어머니.
마음이 따뜻한 내 어머니의 딸로 태어나서 참 다행이다.
2018. 5. 6 은목(銀木)
<인생 스케치북>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일흔 살 은목(銀木) 선생님의 글. 아흔네 살 어머니를 추억하는 이 글은, 선생님이 쓰신 열한 편의 글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이다. 슴슴하지만 편안하고 담백한 봄나물 같은 글.
빛나는 원고를 발견한 편집자의 기분이 이럴까. 30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던 선생님이자, 두 아이를 홀로 키운 어머니, 그리고 지금은 아흔네 살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칠순의 딸.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은목(銀木)선생님의 글을 부탁드려 받았다.
칠순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싶어서 2년 전부터 틈틈이 글을 쓰셨다고. 선생님 글에 단박에 반해버려서 더 읽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 퇴고까지 마친 열한 편의 글을 원고처럼 묶어서 건네주셨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던 지하철에서 냉큼 읽어버리고 오래오래 따뜻했다.
정말이지 삶만큼 진솔한 소재가 없고, 얼굴만큼 정직한 시간이 없다. 책상 위에 노트와 필기구를 가지런히 올려두고 곧은 자세로 앉아 계시던, 반백의 단발머리를 단정히 빗어넘기고 언제나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은목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도 그처럼 늙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