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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Jul 29. 2015

수요일의 누룽지

수요일의 그 녀석,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내가 누룽지를 만난 건, 5월 초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에서였다.


지하철역에서 나오면 바로 코앞에 우뚝 서 있는 전봇대였다. 청테이프로 대충 붙인 전단지가 팔랑거렸다. 누구 하나 시선을 두지 않았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전단지를 살펴보았다.    



주인을 찾습니다


2015. 05. 08일 저녁 발견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특징으로는 목에 파란색 등목줄을 하고 있습니다.

고양이 전체적인 색깔은 흰 바탕에 노랑 얼룩 털을 가지고 있습니다.

빨리 데려가 주세요.  



고양이를 찾아가라는 전단지였다. '주인을 찾습니다'라는 커다란 제목 아래에  고양이 사진이 있었다. 인쇄상태가 좋지 않은 흑백 전단지였는데도 고양이의 눈빛이 튀었다. 목을 쭉 빼고 앉아선 시크한 표정으로 마치 “뭘 보냥?”하고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되게 성깔 있게 생겼네. 나는 피식 웃고 지나갔다.


전단지는 한참을 붙어 있었다. 나는 매일 전봇대를 지나가면서 ‘녀석, 집에는 돌아갔나?’ 궁금해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는 녀석이랑 길거리에서 딱 마주쳤다.


어느 날 집 앞 카페에서 커피를 들고 문을 나섰는데, 모자를 쓴 아저씨가 헛둘헛둘 하면서 강아지랑 내 앞을 지나갔다. 어라, 자세히 살펴보니 고양이었다. 목줄을 달고 아저씨를 성큼 앞서서 걸어가는 고양이였다. 세상에! 고양이도 산책을 하다니!


“아저씨, 고양이도 산책해요?”


나는 다급하게 아저씨를 불렀다. 아저씨가 멈춰 서서 말했다. 아니, 아저씨는 계속 제자리걸음을 뛰면서 말했다.


“그럼, 이 녀석이 산책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저씨는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까맣게 탄 얼굴에 볼만 발그레 달아올랐다. 아저씨는 이장님 같은 모자를 머리에 걸쳐 썼는데 아저씨가 제자리걸음을 뛸 때마다 모자가 오르락내리락, 막 벗겨질 것 같아 아슬아슬했다. 아저씨는 숨이 가빴다. 코털이 삐져나온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수염이 콕콕 난 입술로 연신 후아후아, 조금 오버스럽게 숨을 쉬셨다. 산책이 그렇게 빡세신가.


그때 빼꼼 고개만 뒤로 돌린 채 나를 쳐다보고 있는 고양이랑 눈이 마주쳤다. 목을 쭉 빼고 시크한 표정으로 마치 “뭐 하냥?”하고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앗! 그 녀석이다. 나는 단박에 전단지 속에 그 녀석인 걸 알아챘다. 목줄도 파란색이었다. 그 녀석이 맞다. 사람 얼굴도 잘 헷갈리는 내가 고양이 얼굴을 구분하다니. 정말 신기했다.


녀석은 상상보다 더 꼬질하고 까칠했다.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꼬질꼬질했다. 목줄만 아니었으면 그냥 길고양이라고 착각했을 생김새였다. 털은 언제 씻었는지 모르게 때가 타서 누리끼리했고, 모자를 뒤집어쓴 것처럼 머리에 노랑 무늬가 선명했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리깔아 보는 눈빛이, 나를 자기보다 서열 아래로 보는 게 분명했다.  


녀석은 나를 깔아보다가 아저씨를 척하고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고양이가 목줄을 끌자 아저씨는 다시 헛둘헛둘 하면서 고양이를 쫓아갔다. 아저씨가 고양이를 산책시키는 게 아니라, 고양이가 아저씨를 산책시키는 것 같았다. 역시나 되게 성깔 있네. 푸하하. 난 웃음이 다 났다.


누런 얼룩무늬에 딱딱한 누룽지같이 깡다구가 보통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그 녀석을 누룽지라고 부르기로 했다. 누룽지와 아저씨는 우리 집 바로 옆 빌라에 살고 있었다. 그 후로도 종종 나는 아저씨를 산책시키는 누룽지와 마주쳤다. 인사라도 건넬라치면 녀석은 여전히 나를 깔봤고, 나는 매번 무시당했다. 아저씨를 끌고 총총총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아놔, 저 녀석 고양이가 아닐지도 몰라.  



처음 누룽지를 보았던 전단지. 동네 동물병원에 아직 전단지가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밤에 찍은 폰사진이라 화질이 좋지 않지만, 녀석의 포스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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