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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Sep 02. 2019

엄마가 계속 기억해 둘게

작은 너희가 올해의 여름을 잊어버려도 괜찮아

"엄마, 이게 무슨 소리예요?"


미끄럼틀 계단을 올라가던 지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멈춰 선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은행나무에서 쓰르르르 소리가 들린다.


"매미가 울고 있네."

"매미요?"

"응. 매미가 울면 여름이 찾아온 거야."


쓰르르르 매미 소리에 아이들과 쫑긋 귀를 기울이던 7월 8일 저녁을 기억한다. 올해 여름은 그날 찾아왔다. 서안 지안과 함께하는 세 번째 여름이었다.


아이들을 만나고 사계절이 선명해졌다. 쑥쑥 자라는 여름풀처럼 아이들은 날마다 자랐다. 우리는 매일 밖으로 나가 놀았다. 볕을 쬐고 바람을 쐬면서 힘차게 뛰어다니다가 날이 저물 때쯤 집으로 돌아와 저녁밥을 지어먹었다. 해가 긴 여름은 천천히 아름답게 저물었다. 창문을 활짝 열고서 툴툴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아이들과 노을을 구경했다. 행복한 날들이었다.


비가 갠 어느 오후에는 운동장에서 놀았다. 고인 빗물이 얕고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서안은 신이 나서 옷이 다 젖도록 발을 첨벙첨벙 굴렀고, 지안은 발바닥에 살짝 물이 닿았다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쌍둥이인데도 어쩜 이리 다르담. 우리는 엉망인 꼴로 집으로 돌아왔다. 씻고 나와선 수박을 먹으며 여느 때처럼 노을을 구경했다. 벌러덩 누워있던 서안이 "엄마 달!"하고 소리쳤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가느다란 눈썹달 하나가 서둘러 떠 있었다. "정말 달이네." 우리는 창문에 조로로 붙어 서서 달을 보았다. 밤이 짙어질 때까지.


바람이 선선한 어느 여름밤에는 온 가족이 밤 산책을 나섰다. 달칵 달칵 슬리퍼를 끌고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걸었다. 밤공기가 좋아서 내친김에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아이들은 다다다 뛰어가다가, 엄마 손 붙잡고 걷다가, 아빠 목마를 탔다가, 결국엔 졸음이 쏟아져 엄마아빠 등에 나란히 업혔다. 잠든 아이들을 업고 걸었다.


애들 많이 컸다. 제법 묵직해졌구나. 새근새근 숨을 쉬네. 애들 자는 얼굴은 어쩜 이리도 예쁠까. 나중에 돌아보면 지금이 그리운 순간이겠지. 행복하네. 행복하다. ㅡ 남편과 나는 따듯하고 묵직한 행복을 하나씩 등에 업고 여름밤을 걸었다.


늘 좋았던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아이들은 올여름 자주 아팠다. 두 녀석 모두 열감기와 구내염을 심하게 앓았다. 지안은 탈장 수술까지 했다. 밤새 불덩이 같은 작은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주었고, 두 시간마다 일어나 해열제를 먹였다.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이의 등을 바라보았다. 아프지 마. 아프지 마. 아픈 아이들을 안고서 나는 자주 울었다. 그렇게 축축한 장마 같은 시간을 보내다가도 어느 아침에 반짝, 아이들은 말끔히 나아져 있었다. 그 사이 훌쩍 자라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들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간직하고 싶다. 함께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의 시간은 계절처럼 조용하게 빨라서, 문득 멈추어 돌아보면 벌써 저만치 지나가 있다. 다시 앞을 돌아보면 아이들은 엄마를 앞질러 저만치 뛰어가고 있고. 아마도 가장 그립고 행복할 시간들. 그러나 정작 아이들은 기억하지 못할 시간들. 그래서 행복한 만큼, 그만큼 서글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느 광고 카피를 떠올린다.


작은 네가 올해의 여름을 잊어버려도 괜찮아.

엄마가 계속 기억해 둘게.


당연한 말이지만 아이들은 자라고 부모는 늙는다. 오랜 후에 내 삶을 돌아보았을 때, 지금이 가장 눈부신 시간일 거라고. 어쩐지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 같다. 선명한 행복은 이다지도 확실하다.


붙잡고 싶다. 그러나 손에 쥔 모래처럼 꽈악 움켜쥘수록 소소소 빠져나가는 것이 행복이라는 걸, 시간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이것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반짝일 거라는 것도. 언젠가 내가 무척이나 불행하고 어려운 날에 빛이 되리라는 것도 나는 안다.


올해의 여름은 행복했다. 우리가 자주 걷던 은행나무 길과 이팝나무 길, 쓰르르르 귀 기울이던 매미소리, 아이스크림 같았던 뭉게구름, 초록불을 기다리던 신호등, 자주 내리던 소나기, 손을 내밀고 비를 맞던 너희들, 저녁에 뜬 눈썹달, 날마다 함께 구경하던 노을,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 서로를 품에 안았던 감촉과 마음, 세 살의 너희와 서른넷의 나. 붙잡아 두진 못하더라도 기억하고 싶다.


서안 지안.

작은 너희가 올해의 여름을 잊어버려도 괜찮아.

엄마가 계속 기억해 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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