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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Jun 17. 2020

잠시 멈추고 기다리는 시간

나는 고여 있는 게 아니라 잠시 멈춰 있는 거야

먼지 쌓인 드립포트를 다시 꺼낸 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였다. 겨울부터 봄까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가장 절실했던 건 의외로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따뜻하고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시간. 이를테면 단골 카페 구석에 앉아 글 쓰며 마셨던 커피, 친구와 테라스에 마주 앉아 볕을 쬐며 나누던 커피, 나무들이 우거진 길을 산책하며 홀짝이던 커피. 평온한 장소에서 여유롭게 마시던 커피 한 잔이 이토록 소중한 행복이었다니.


하루는 씁쓸한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다가 다시 커피를 내려 볼까 싶어 졌다. 오래전에 핸드드립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 수업용으로 사두었던 드립포트가 어딘가 있을 터였다. 찬장을 뒤져 드립포트와 드리퍼와 서버를 꺼내 깨끗이 닦고 여과지와 원두를 주문했다. 기억 속에 흐릿해진 드립법은 인터넷으로 검색해 다시 되감아보았다. 이 과정이 조금 번거롭긴 했지만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이런 시간과 정성을 들인다는 것이 새롭고 좋았다. 이후로 매일 아침 커피를 내려 마시는 일은 하루를 시작하는 나만의 의식이 되었다.


먼저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다. 물이 데워지는 동안 드리퍼에 여과지를 끼우고 적당히 갈아진 원두를 담는다. 원두가 가지런해지도록 드리퍼를 바닥에 탁탁 두드리면 원두향이 고소하게 피어오른다. 드리퍼를 서버에 올려두고 데워진 물은 드립포트에 옮겨 담는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드립포트를 들고서 가만히 숨을 고른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므로.


욕심부리지 말고 원두를 적셔주기만 한다는 마음으로, 작은 원을 그리며 물을 조금만 부어준다. 마른 화분에 살짝 물을 끼얹듯이. 그러면 원두가 오븐 속에 빵처럼 포포포 부풀어 오른다. 원두 구석구석 물이 스며들도록 뜸을 들이는 시간. 잠시 멈추고 기다리는 이 시간이 바로 커피의 맛을 좌우한다. 너무 조급하지도 너무 느긋하지도 않게 살피며 기다려야 한다.


뜸을 들인 물이 초로록 하고 서버에 떨어지면 곧장 가느다란 물줄기를 부어가며 커피를 내린다. 다 내린 커피는 좋아하는 머그잔에 옮겨 담고 창밖이 잘 보이는 자리로 가져가 폭 앉는다.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오늘을 생각한다. 오늘의 날씨, 오늘의 할 일, 오늘의 메뉴, 오늘의 기분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가다듬고 기대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하는 아침은 어김없이 좋다.


3월에 솜사탕처럼 부풀어 피었던 창밖에 벚꽃 나무는, 4월에 봄비를 맞으며 꽃이 지고 연둣빛 잎들이 돋아나더니 5월에는 초록으로 우거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6월. 날마다 울창하게 기지개를 켜는 나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달콤한 신맛과 꽃내음 같은 잔향이 감도는 원두커피를 내려 마시고 있다. 커피와 풍경에서 산뜻한 초여름이 느껴진다. 커피 한 잔은 시간을 느리게 만들어 계절의 변화를 선명히 느끼도록 해 준다.


겨울과 봄을 지나 여름의 초입까지. 모두가 힘든 시간을 지내고 있다. 마음껏 걷고 만나고 껴안을 수 없는 날들은 마음을 삭막하게 만들고, 제자리에 고여 있는 것 같은 막막함과 불안함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가장 필요한 건 의외로 아주 사소한 것이라는 걸 커피를 내리면서 깨달았다. 잠시지만 나의 마음과 일상을 살피는 시간. 찬찬히 커피를 내리며 마음속으로 말하곤 했다. 나는 고여 있는 게 아니라 잠시 멈춰 있는 거야. 너무 조급하지도 너무 느긋하지도 않게, 나를 충분히 살피고 있는 거야.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어떤 순간에는 나아가기보다는 멈추고 돌아보아야 할 때가 있다. 지금 내 몸과 마음은 어떠한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내가 지나치고 놓친 것은 없는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멈추고 돌아보고 돌볼수록 가야 할 방향은 선명해지고 나아갈 힘이 생긴다.


잠시 멈춘 지금을 삶에 뜸을 들이는 시간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지금은 내 삶을 가다듬고 기대하는 시간이라고. 그렇다면 다가올 내일이 그저 막막하고 불안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기다리고 기대하는 사람에게 내일은 좋은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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