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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Sep 20. 2019

마음은 편지로

정작 하고 싶은 말들은 마음에 숨겨두곤 하니까

나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손편지를 적어주는 괜찮은 취미가 있다. 나의 편지는 여러 장의 긴 편지일 때도 있고, 손바닥만 한 작은 엽서일 때도 있다. 직접 고른 책의 속지일 때도 많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줄 때도 반드시 편지와 함께 준다. 달랑 선물만 주고 나면 어쩐지 내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 들어 아주 짧더라도, 축하해. 고마워. 건강해. 힘내. 사랑해. 내 마음을 손글씨로 적어 건넨다.


올해 보냈던 편지들을 떠올려 본다. 쉰일곱 번째 생일을 맞이한 엄마에게는 새로 쓴 책을 선물하면서 책 속에 이런 마음을 적어 보냈다. 


“엄마,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놀라곤 해. 누군가를 이만큼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엄마가 나에게 준 사랑이 나를 작가로, 엄마로 자라게 했어. 고마워 엄마. 사랑해.”


20년 지기 친구가 결혼하던 날에는 축의금과 두 장 짜리 편지를 함께 넣어 건넸다.


“나는 너를 생각하면 미안함보다 고마움이 커. 너한테 늘 받기만 하고 의지하기만 했는데도 미안하기는커녕 고맙기만 하다. 이런 마음이 되게 염치없고 이기적인 거 아닐까 하고 걱정했었어. 그런데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 누군가에게 받았던 마음을 떠올렸을 때, 미안하면 내 마음에 짐이 있는 거고. 고맙다면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는 거라고. 너는 나에게 고마운 사람이더라.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인에게는 울라브 하우게의 시집을 선물하며 맨 앞장에 조심스러운 진심을 적어 보탰다.


“올해에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올까요. 어떤 날들이든 힘이 되어주고 싶어요. 부디 따뜻함을 잃지 말기를. 시집 속에서 제가 아끼는 구절을 나눕니다. - 꽃노래는 많으니 나는 가시를 노래합니다. 뿌리도 노래합니다.”


3개월간 글쓰기 모임을 함께한 학인들에게는 연필 한 자루와 작은 노트를 선물하며 노트 앞 장에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그동안 기꺼이 마음 써주셔서 감사해요. 함께여서 행복했습니다. 우리 오래오래 쓰는 사람으로 살아요.”


독자에게 사인을 해줄 때도 그렇다. 나는 특별한 사인이 없는 대신 짧은 메시지를 적어주는데, ‘누구나 누군가의 별’, ‘당신 삶이 아름다워요’, ‘늘 따뜻하길’. 독자에게 보내는 작은 편지라고 생각하면서 쓴다.


5월과 6월에 쓴 편지






사실 편지를 쓰는 일에는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든다. 한 사람을 생각하며 편지지를 고르고 빈 종이에 빼곡히 마음을 써 내려가는 일. 쓰는 동안 종이 위에는 나와 수신인 둘 뿐, 시끄러운 세상도 잠시 조용해진다. 쓰다 보면 쑥스럽기도 하고 글씨가 틀리기도 하고 문장이 꼬이기도 한다. 하지만 서툴더라도 조금 헤매더라도, 찬찬히 써 내려갈수록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내 마음 역시 명확해진다. 단 한 사람을 향한 고백. 그렇기에 편지는 가장 진솔한 글이 아닐까 싶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볕이 온화하다. 계절이 변하는 느낌은 몸이 먼저 알아채고, 마음도 뒤따라 움직인다. 왠지 모르게 나긋하고 평온하며 기분이 좋다면 그건 마음에도 가을이 도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을이다. 나무들은 물들고 과실과 곡식들은 여물어 간다. 서로의 살갗이 닿는 느낌은 덥지 않고 따스해진다. 식물들이 부드럽게 여물어 가는 것처럼, 이 계절에는 사람도 다정하게 영글어 가는 것만 같다. 가을은 성숙과 화해의 계절. 편지를 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다.


그래서일까. 가을 노래에는 유독 편지 이야기가 많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가 ‘잊혀져 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내려가는 계절. 설레는 봄에 떠올랐던 보고 싶은 얼굴과 그리운 이야기들이 차분히 되돌아오는 계절, 나에게 가을은 ‘편지의 계절’이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말들을 주고받고 살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들은 마음에 숨겨두곤 한다. 진지하기가 영 쑥스러워서, 자주 만날 수가 없어서, 세상살이가 바쁘고 건조해서.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마음이 있고, 떨어져 있기에 전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런 마음의 말들을 전하기에 휴대폰 메시지는 너무 가볍고 전화 통화는 역시나 부담스럽다. 그럴 때 편지를 써보는 건 어떨까.  


편지 쓰기가 아무래도 어렵다면 내가 자주 사용하는 좋은 방법 하나를 알려주고 싶다. 좋아하는 책이나 시집 한 권을 골라 속지에 편지를 써서 선물하는 것이다. 내가 전하고픈 메시지가 담긴 책이라면 더욱 좋다. 속지에 짧은 편지와 날짜와 장소를 남겨둔다. 그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책이자 편지가 된다. 작고 가볍고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의미 있는 선물이다.


선물 받은 이는 시간이 흘러도 반가워할 것이다. 기뻐할 것이다. 어느 가을, 책 사이에 끼워둔 은행잎처럼, 꺼내 읽을 때마다 당신을 발견하고 떠올릴 테니까. 마음은 오래 그곳에 남아 살아갈 것이다.


1월에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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