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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ug 24. 2020

바람을 만들어 주는 사람

나도 선풍기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더운 거 이제 아주 지겨워.”

다림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한다. “힘들죠?” 정원은 다림 쪽으로 선풍기를 틀어준다. 눈을 감고 바람을 맞는 다림. 그 곁에 정원이 앉는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이 짧은 장면을 좋아한다. 지칠 대로 지친 사람에게 힘들죠? 물어봐주는 속 깊은 목소리와 선풍기 방향을 돌려 틀어주는 다정한 손길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는 조심스러운 마음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나도 선풍기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나는 선풍기로 여름을 보낸다. 기관지가 약해서 겨울바람처럼 찬 에어컨을 싫어하는 탓도 있지만, 유난히 선풍기를 좋아하기도 했다. 커다란 머리로 윙윙윙윙 조그만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서 나는,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고 아아 소리 내어 보던 아이였고, 할머니에게 손가락을 맡긴 채 봉숭아 물들이던 중학생이었다. 야자하고 돌아와 숨덩숨덩 자른 수박을 가족들과 나눠먹던 고등학생이었고, 비좁은 교내방송국 부스에서 몰두해 원고를 쓰던 대학생이었다. 어두운 바닥에 돌아온 채로 누워 바람을 쐬던 사회초년생이었고, 젖은 머리를 말리며 차가운 맥주를 마시던 서른, 그리고 아이들을 업고서 자장가를 불러주던 엄마였다. 여름날, 선풍기 앞에서 보낸 시간들이 소중했다. 선풍기가 만들어준 바람은 나에게 추억이자 휴식이자 위로였으니까.

나는 이 정답고 커다란 기계를 여름마다 꺼내어 곁에 둔다.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날에 조그만 스위치를 달칵 누르면 커다란 날개가 돌아간다. 윙윙윙윙. 어쩐지 매미소리나 파도소리처럼 느껴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춥지도 억지스럽지도 않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창문을 활짝 열어도 괜찮은 바람, 때때로 뜨거운 햇볕과 빗소리와 바다 냄새가 뒤섞인 바람을 맞으며 나는 몸과 마음이 한 김 식어 산들산들 찬찬해진다.

내가 아는 선풍기 중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선풍기를 알려주고 싶다. 그림책 <할머니의 여름휴가>에는 고장 난 선풍기로 여름을 보내는 할머니가 나온다. 어느 날 바닷가에 놀러 갔다 온 손자가 “바닷소리를 들려 드릴게요”라며 할머니에게 소라 껍데기를 선물하고 간다. 다시 빈방에 남은 할머니는 강아지 메리와 함께 소라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 펼쳐진 바닷가에서 비밀스럽고 한가로운 여름휴가를 보낸다.

꽃무늬 수영복을 입고서 갈매기와 수박을 나눠 먹고, 메리와 바다표범과 모래 위에 뒹굴며 살을 태우는 할머니. 기념품 가게에 들러 조개모양 바닷바람 스위치를 산다.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고장 난 선풍기에 바닷바람 스위치를 끼운다. 윙윙윙윙. 세차게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서 미소 짓는다. 방 안에 바닷바람이 가득 찬다. 아마도 손자는 바다에 가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파도소리가 들리고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한여름 바다를 선물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8월, 한여름은 어김없이 덥다. 지루한 장마 끝에 공기는 꿉꿉하고 햇볕은 맹렬하다. 그런데도 마스크를 벗을 수 없는 일상은 우리를 더욱 지치게 만든다. "더운 거 이제 아주 지겨워." 어쩌면 모두가 그런 마음으로 이 여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름은 한결같이 더운 계절. 그러나 여름의 기억들이 한결같이 싫지만은 않은 건, 덥고 지친 나에게 바람을 만들어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봉숭아를 올려 손가락을 감아주던 할머니, 숨덩숨덩 수박을 잘라주던 엄마, 아이스커피를 내밀던 친구,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온 동생, 맥주 캔을 부딪쳐주던 남편, 새근새근 숨결을 전해주던 아이들 덕분에, 더운 마음에도 고마운 바람이 불었다.

나에게 여름은 그런 계절이다. 지치고 혼자인 사람에게, 사실은 몹시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바람을 만들어 주고 싶은 계절. 다림을 향해 선풍기를 틀어주던 정원처럼. 할머니에게 소라 껍데기를 선물하던 손자처럼. 나에게 바람을 만들어 주었던 사람들처럼. 나도 선풍기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힘들죠? 많이 더우시죠? 어떻게 지내요? 안부를 묻고 싶은 마음으로 선풍기를 튼다. 전화를 든다.




좋아하는 영화의 한 장면으로부터 시작된 글. 기상청 기관지 <하늘사랑> 8월호에 선풍기가 되고 싶은 마음을 썼습니다. 요즘 정말 힘들죠? 어려운 시기에 모두들 건강히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가을에 새 책으로 인사드릴게요. 바람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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