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수리 Oct 30. 2020

인생은 이상하고도 아름답단다

엄마와 나의 아름다운 영화관

노란 은행잎이 거리를 폭닥 덮으면 엄마랑 폭신폭신 바닥을 밟으며 걸어가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왔다. 집에 돌아와 커튼을 닫고 이불을 깔고 있자면 엄마는 따뜻한 믹스커피와 좋아하는 크래커를 쟁반에 담아왔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했다.


시간이 가라앉은 듯 어둑한 방 안에는 커피향이 은은하고 텔레비전 불빛이 반짝였다. 엄마랑 크래커를 커피에 찍어 먹으며 영화를 보았다. 나는 커피를 마실 줄 모르는 아이였지만, 이때만큼은 어딘가 외딴 세계에 숨어들어 엄마와 친구가 된 것 같았다. 우리는 어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를 사이좋게 나누는 둘도 없는 단짝 친구. 돌아보면 그 시간은 은행잎을 밟으며 걷던 노란 시간을 닮아서 안전하고 평온했다.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볼 때 엄마는 뜯어진 이불 섶을 꿰매고 있었다. 나는 엄마 다리를 베고 누워서 졸고 있었는데 엄마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딸, 이 장면은 봐야 해.’하고 속삭였다.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걸어보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주춤거리던 학생들은 저마다 다른 걸음걸이로 걷기 시작했다. 혼자 멈춰 있던 학생은 걷지 않을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엄마가 소곤거렸다. “너는 어떻게 걷고 싶니?” 순간 머리가 팽, 하고 당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엄마의 물음은 이불 섶을 단단하게 꿰맨 무명실처럼 오래도록 나를 붙잡았다.


‘시네마 천국’을 볼 때에 나는 아버지를 잃은 토토와 눈이 먼 알프레드 아저씨가 가여워서 뚝뚝 울고 있었다. 왜 영화에서 나쁜 일들은 어김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걸까. 알프레드 아저씨가 토토를 위해 검열에 잘린 키스신을 모아둔 필름 뭉치를 영사기로 돌려보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을 때, 나는 영화의 의미도 야릇한 키스신도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어째선지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는 오래 산 할머니처럼 말했다. “인생은 이상하고도 아름답단다.” 좀처럼 알 수 없었던 알프레드 아저씨의 말처럼 엄마의 말도 어려웠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것들도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화 <시네마 천국>


엄마와 ‘안토니아스 라인’과 ‘마농의 샘’을 보았다. '흐르는 강물처럼‘과 ‘가을의 전설’, ‘굿 윌 헌팅’을 보았다. 모두 엄마가 골라 보여준 영화들이었다. 엄마는 어린 나에게도 사랑과 비극과 오해와 죽음과 삶이 펼쳐지는 영화들을 가리지 않고 보여주었다. 좋아하는 영화를 여러 번 보던 엄마. 봤던 영화를 다시 보다가도 좋아하는 장면들이 나오면 소곤거렸다.


어쩜. 이 장면은 꼭 봐야 해. 사랑은 좋지만 아프지. 아파도 계속 아프고 싶지. 너도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사실 엄마는 저런 삶을 살고 싶었는데... 사람은 그럴 수도 있단다. 결국 안아주는 것도 사람이지. 인생이란 건 알 수 없는 거야. 세상에 이해하지 못할 일은 없단다.


영화가 끝나고 형광등을 켜면 다 녹은 크래커 조각이 커피잔에 남아있었다. 식어버린 커피와 뭉그러진 과자와 얼룩진 커피 자국. 다시 우리 삶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나는 돌아온 삶에서도, 사랑과 비극과 오해와 죽음과 삶 같은 것들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나 극적이진 않을지라도 우리도 영화와 비슷한 삶, 그 어딘가를 살고 있다는 것도.


엄마와 보았던 영화들이 모두 선명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몇몇 장면들만 드문드문 잘려진 필름처럼 남아 있을 뿐. 그러나 나에게 영화를 보여주었던 엄마 나이쯤 되자 알 수 있었다. 엄마가 어린 나에게도 거리낌 없이 영화를 보여 주었던 이유를. ‘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도 아저씨처럼, 엄마는 나에게 주고 싶은 장면들, 알려주고 싶은 인생들을 모아서 선물했던 건 아닐까.


그로부터 긴긴 시간이 흐른 뒤에, 영화보다 더 극적인 비극을 몇 번쯤 경험한 후에, 나는 엄마가 모아준 필름 뭉치들을 도르르 되감아 보면서 생각했다. 그럼에도 사랑은, 그럼에도 인생은 이상하고도 아름답다는 걸. 엄마 덕분에 믿을 수 있었다.


영화 <시네마 천국>



기상청 기관지 <하늘사랑> 10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깊어가는 가을, 여러분도 작은 행복을 만들기를 바라요. 믹스커피에 에이스 찍어 먹으며 좋아하는 사람과 영화를 보는, 소소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  


매거진의 이전글 바람을 만들어 주는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