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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Sep 04. 2020

조금 긴 여름방학을 보냈어

한 줄도 쓸 수 없는 날들에, 나는

8월에는 빈 시험지를 앞에 두고 꿈을 꾸는 사람처럼 보냈다. 도무지 문제도 답도 알 수가 없고 어떤 말도 적을 수가 없어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상한 마음으로 글을 쓰지 못했다. 그나마 꿋꿋이 앉아서 막바지 교정작업을 하고 밀린 일기장을 채우는 일이 나의 최선이었다.

긴 감기와 긴 돌봄과 예상치 못한 사정들로 인해 일상이 기우뚱거렸다. 8월 한 달, 자가격리 수준으로 외출을 삼가고 집에만 머물렀다.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자꾸만 우울해지기에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는 거야.

8월에는 여름방학을 보냈다. 생활계획표도 만들지 않고 매일을 심심하고 나른하고 게으르게 보냈다. 무언가 해야만 한다는 초조함과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자책감이 끼어들 때마다 '나는 지금 여름방학 중이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했다. 서안지안과 밥 먹고 놀 생각만 했다. 어제와 오늘이 비슷하게 지나갔다. 해질녘엔 아이들이랑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이들이 말했다. 엄마. 저기 봐봐.

"낮이 가고 있어."
"밤이 오고 있어."

낮은 하얀색이야? 밤은 연두색이야? 묻는 아이들의 말에 그래, 어쩌면 하얀색이네. 어쩌면 연두색 같은 걸. 하고 창 밖의 낮과 밤을 보면서 내가 보는 하늘은 무슨 색인지 골똘히 생각했다. 방학동안에는 이런 것들만 생각하자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고. 다시 찾아올 이야기는 그때 생각하자고.

열심히 쓰려고 애쓰며 사는 사람에게도 이런 시기는 온다. 혹시나 열심히 쓰려고 마음먹었는데 한 줄도 쓸 수 없는 날들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보낸 여름방학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별 일은 없었어. 어제도 오늘도 심심하고 나른한 시간들을 게으르게 보냈거든. 그러다가 어느 아침 일어나 창문을 열었더니 가을이 왔더라는 이야기를. 그때 문득,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매 순간 세상은 너를 초대하고 있다던 어느 시인의 목소리가 생각나더라. 그런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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