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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Dec 24. 2020

노래를 불러주는 마음으로

우리는 아무도 혼자가 아니라고

혼자인 사람에게 노래를 불러준 밤이 있다. 열 살 무렵, 나는 눈이 많이 내리는 작고 추운 마을에 살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단짝 친구를 따라 교회를 갔다. 복슬강아지처럼 잘 웃고 잘 뛰어다니던 친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기 때문이다. “같이 노래할래? 우린 밤새 버스를 타고 노래를 부르러 다닐 거야.” 유년부와 청년부가 모여서 새벽송을 돌고 크리스마스 아침까지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친구와 소형 버스에 올라탔다.


자정에 가까운 밤, 버스는 노란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눈 덮인 산길을 쿠르르르 달렸다. 평소라면 잠들었을 깊은 밤에 친구와 언니오빠들과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는 기분은 몹시도 들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우리는 내내 노래를 불렀다. 눈이 많은 마을이었다. 가로등과 달빛에 반사된 눈은 희었고, 나무들마다 두툼하게 눈을 덮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떠다녀서 창밖은 겨울이었지만 따스하게 느껴졌다. 겹겹이 껴입은 외투와 복슬복슬한 목도리와 털모자 때문일까. 보드랍고 둥실한 눈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나는 친구와 동그랗게 마주 웃었다.


깊고 깊은 산골로 들어간 버스는 때때로 외딴집 앞에 멈춰 섰다. 우리는 조잘거리며 버스에서 내렸고, 대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아이들 소리에 서둘러 나온 어르신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는 씩씩하게 인사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 밤. 크리스마스이브에 사방에 눈이 덮인 산골 어디쯤에서 하얀 입김을 불며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그곳은 너무도 고요해서 우리들 노랫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노래를 듣던 얼굴들은 하나같이 뭉클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면 어르신들이 곶감이랑 귤, 고구마 같은 간식들을 안겨주셨다. 다음 집으로 향하는 사이에 우리는 그것들을 오물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새벽이 깊어서야 마지막 집에 들렀다. 가장 깊은 산골이었다. 집까지 버스가 닿을 수 없어서 모두들 내려 눈을 밟으며 언덕길을 올랐다. 꼭대기에 반짝이는 집 하나.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나온 할머니 한 분이 우리를 반겼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우리는 할머니께 노래를 불러주었다. 마지막 노래가 끝났을 때, 우리는 추위와 졸음에 조금 지쳐 있었다. 할머니는 집에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할머니의 집은 작고 깨끗하고 추웠다. 단출한 세간이 한눈에 보였다. 전기장판과 그 위에 이불 한 채. 우리는 전기장판에 다닥다닥 붙어서 이불을 덮고 언 몸을 녹였다.


까만 봉지를 들고 온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한 줌씩 꺼내 쥐어주셨다. 유가사탕이었다. 할머니는 말은 없었지만 웃음이 넘치는 분이셨다. 활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 가장 어렸던 나와 친구를 아주 예뻐해 주셨다. 할머니와 유가사탕을 까먹었다. 다디단 하얀 맛. 침이 고이고 달달함이 핑 돌아 속이 따뜻해졌다. 졸음이 몰려왔다.


돌아오는 버스에선 모두가 잠들었다. 교회에 도착하고서는 애써 잠을 이기며 놀다가 새벽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너무 졸려서였을까. 아니면 아예 잠들어 버렸나. 다음 날 밝은 크리스마스의 기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노래를 부르던 밤의 기억만이 선명하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을 때마다 그날의 어린 밤이 생각난다. 훗날 어른이 되고 알 수 있었다. 한밤중에 찾아온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웃음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선물이었을지.


12월. 저물어가는 겨울에 혼자인 사람을 생각한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혼자인 사람에게 똑똑, 문을 두드리고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 노래가 끝나면 우리 유가사탕을 나눠먹을까요. 다디단 하얀 사탕을 나란히 오물거리면서, 동그랗게 마주 웃으면서. 그만큼의 마음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이 겨울은 따뜻할 텐데요.


유난히도 외롭고 힘들었던 한 해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무도 혼자가 아니라고. 노래를 불러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모두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기상청 기관지 <하늘사랑> 12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꼭 크리스마스이브에 올리고 싶었어요.


혹시 <나 홀로 집에 2>에 나왔던 케빈과 비둘기 아줌마 기억하시나요? 기억에 남는 둘의 대화를 옮겨보아요.


"그나저나 왜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 있는 거니? 잘못한 게 있니?"

"네, 엄청 많아요."

"착한 일을 하면 나쁜 일은 지워준다는 거 아니?"

"너무 늦었어요. 제가 한 모든 나쁜 짓을 지울만한 시간이 충분할지 모르겠어요."

"크리스마스이브잖니. 아직 오늘 밤이 남아있단다. 다른 사람을 위해 어떤 중요한 일을 해볼지 생각해 보고, 그리 해보렴. 그저 네 마음속에 별을 따라가면 된단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모두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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