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다섯 살 어린이들과 기차를 탔다. 유아동반석을 검색해 ‘유아동반/편한대화’ 객차를 예매했다. 해당 객차는 다소 시끄러울 수 있으며, 지나친 소음이 다른 고객의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안내를 숙지하고 기차에 올라탔다.
주말 오전 기차는 만석이었다. 어린이들과 기차를 타는 건 처음이었기에 지루해하고 소란스럽게 하면 어쩌나 걱정되어 나는 여러 번 일러주었다. “여러 사람과 같이 기차를 탄 거야.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돼. 마스크도 꼭 쓰고 대화도 조용히 해야 해.”
기차가 얼마 달렸을 때, 어디선가 어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너 살 정도 되었을까, 갓 말이 트여 짧은 문장을 감탄사처럼 말하는 어린이였다. “엄마! 어디 가?” “저거 뭐야?” “우와!” 부모는 어린이를 조용히 타일렀다. 그런데 그때, 어느 노인이 호통을 쳤다. “시끄러워 죽겠네!” 그리고 이따금 어린이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노인의 호통은 나무람을 넘어 비난에 가까워졌다. “조용히 해. 여기가 너네 집 안방이야? 가정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급기야 노인이 욕설을 내뱉었고, 객차 안은 싸늘해졌다.
어쩐담. 어린이와 부모가 느낄 마음이 걱정되었다. 나는 승무원에게 제지를 부탁했다. “안 그래도 민원이 접수되었어요.” 그제야 돌아보니, 문 뒤에 어른들이 모여 승무원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린이를 염려하는 어른이 많았구나.
100년 전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 선언문을 낭독하며 어린이들에게 당부했다. “전차나 기차에서는 어른들에게 자리를 사양하기로 합시다. 입을 꼭 다물고 몸을 바르게 가지기로 합시다.” 그리고 어른들에게 부탁했다.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자세 타일러 주시오.” 객차 안 어린이가 들어야 할 말은 비난과 욕설이 아니라 자세한 타이름이 아니었을까.
우리 모두는 어린이였다. 어린 시절 버스와 기차를 타고 다니며 일러주었던 부모의 말과 공공장소에서 보여주었던 어른들의 태도를 배우며, 타인을 배려하고 관용을 베푸는 어른으로 자랐다. 더 많이 알고 경험한 어른이 방정환 선생의 말처럼 ‘자세자세’ 타일러 주고 지켜봐 주기에 어린이는 공공예절을 배운다. 크고 작고 다른 우리는 그렇게 함께 살아간다.
소란이 지나가고, 정차한 역에서 승객들이 바뀌었다. 갓난아기를 안은 부모가 우리 앞에 앉았다. 아기는 방긋방긋 웃다가 응애응애 울었다. “아기가 왜 울어요?” “아기는 왜 이렇게 작아요?” 우리 집 어린이들의 물음에 웃으며 답해주었다. “너희도 울음으로 말하던 조그만 아기였어.” 갓난아기와 어린이들과 어른들과 함께, 우리는 기차를 탔다.
7월 9일자 동아일보 [관계의 재발견] 칼럼을 썼습니다. 어린이는 작아도 한 명, 공공장소에서도 어린이를 배제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요.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자세 타일러 주시오.” 백년 전 방정환 선생의 부탁을 오늘날 어른들에게도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