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죽고 싶다는 말, 잘 살고 싶다는 말
“어떻게 살고 싶어요?” 지인은 대답했다. “나는 잘 죽고 싶어요. 그러려고 매 순간 노력하며 살아요.” 그는 매일 일터에 나가 저녁까지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일기를 쓰고, 책을 읽다가 잠이 든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다시 일터로 향한다. 성실하고 충실한 매일을 사는 사람. 그에게 남다른 특별함이 있다면, 그는 뾰족한 말을 하지 않는다. 화창하게 웃는다. 씩씩하게 걷고, 맛있게 밥을 먹는다. 사람들을 잘 살피고 사소한 것들에 아이처럼 감동한다. 삶을 단단하게 꾸려 나가는 사람이기에 건네 본 물음이었는데, 돌아온 의외의 대답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어떻게 죽고 싶어요?” 그와의 대화 이후 물음을 바꿔보았다. ‘어떻게 살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봤다. 나는 잘 살고 싶은 바람과 마찬가지로 잘 죽고 싶었다. 정반대라고 생각했던 삶과 죽음은 사실 동그라미를 그리는 시작과 끝처럼 이어져 있었다. 조금이나마 선명한 답을 구하고 싶어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의 삶을 찾아 읽었다.
책 ‘가만한 당신’에는 서른다섯 명의 부고가 담겨 있다. 호주의 코미디언 겸 작가이자 장애인 인권운동가였던 스텔라 영은 1m가 되지 않는 키에 희귀병을 가진 장애인이었다. 서른한 살의 스텔라 영은 ‘여든 살의 나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나는 이 세상에 잘 살려고 왔지, 오래 살려고 온 게 아니다(I‘m here for a good time not a long time). 하지만 여든 살이 될 때까지 모든 가능성을 움켜쥐고 늘 긍정적이고 진취적으로 지혜롭게, 즐겁게 살겠다.” 그는 매 순간 이 약속을 지키며 살았지만, 여든 살까지 살지는 못했다.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스텔라 영의 편지에 불현듯 지인의 대답이 떠올랐다. ‘잘 죽고 싶다’던 말은 ‘잘 살고 싶다’는 바람이 동그랗게 이어진 말이었구나. 나도 그랬다. 이 세상에 잘 살려고 왔지, 오래 살려고 온 게 아니었다. 그제야 둘러보는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매일의 날씨와 매일의 풍경과 매일의 만남과 매일의 대화가, 단 한 번 살아보는 것처럼 새롭게 느껴졌다.
“진짜 삶을 산다는 것은 매일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말했다. 나는 하루라도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처럼 살아본 적 있었을까. 깨끗한 달이 뜬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오늘 밤 죽더라도 후회와 미움 없이 잘 죽고 싶다고. 내일 아침 살아 있다면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처럼 잘 살고 싶다고. 이상했다. 잘 죽고 싶을수록 더 잘 살고 싶어지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