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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ug 27. 2015

목요일의 우연한 산보

우연한 산보, 태평한 미아가 되어 보는 시간



이상적인 산책은 ‘태평한 미아’라고나 할까


만화책 <우연한 산보>의 주인공 대사이다. 이 책은 딱히 특별한 줄거리랄 것도 없다. 일본의 한 문구회사에 근무하는 중견 영업사원 우네노하라가 그냥 동네 곳곳을 산책하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근무 중이나 휴일에 거리와 골목을 걸어 다니면서 정겨운 풍경을 발견하고, 옛날을 회상하거나 생각에 잠긴다. <우연한 산보>는 낭만 아저씨의 '소소한 산책기'라고나 할까.



<우연한 산보>는 쿠스미 마사유키(글)와 타니구치 지로(그림)가 공동작업한 만화책이다. 이 둘은 <고독한 미식가>를 만든 황금콤비로도 유명하다. 만화도 만화지만, 만화 뒤에 수록된 ‘산책 원작 작업’과 ‘원작 뒷이야기’가 정말 흥미롭다. 실제로 작가들이 어떻게 산책하며 이 만화를 만들었는지, 어떤 사람과 어떤 에피소드를 만났는지, 그것들이 어떻게 만화에 표현되었는지 다시 맨 앞장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다. 콤비는 <우연한 산보>를 연재할 때, 독특한 세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고 한다.

 


1. 조사하지 않는다.

<관광 가이드>나 <동네 산책 매뉴얼> 등 책이나 인터넷으로 미리 알아보고 나가지 않는다.

2. 옆길로 샌다.

사전에 지도를 보고 간다고 해도, 걷기 시작하면 그때 그때 재미있어 보이는 쪽을 향해 적극적으로 샛길로 샌다.

3.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시간제한을 두지 않고, 그 날 안에 정하려고 하지 말고 느긋하게 걷는다.


주인공은 산책을 ‘의미 없이 걷는 즐거움’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그렇게 걸음으로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는 에피소드를 만화의 축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했다. 갈 장소는, 마감이 닥쳐 초조해지는 내 직감에 맡겼다. 지도나 노선도를 바라보면서, 가본 적 없는 마을, 내린 적 없는 역, 옛날 친구가 살던 주택가 등 뭔가 느낌이 오면 밑조사 없이 갔다. 실제로 길을 걸어도, 만화로 그릴 만한 것이 없을 때도 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으니 다른 날에 다른 곳을 갔다. 아무튼 만화 원작은 ‘무조건 걷고 본다’는, 대책이 없다면 대책이 없는 행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연한 산보> ‘산책 원작 작업’ 중에서



나도 우연한 산보를 즐긴다.

프리랜서라서 가장 좋은 점은 평일 대낮에도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날의 기분에 따라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거나, 아님 그냥 귀를 열어두고 그 시간의 모든 소리를 들으면서 동네 골목 골목을 걸어 다닌다. 공원 산책도 좋지만, 동네 산책은 또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다양한 사람들과 소소한 일상을 엿볼 수 있다.


그동안 이 동네, 저 동네 산책을 하면서 찍은 사진들을 정리해봤다. 걸어 다니다가 무심코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들이라서 화질이 그리 좋진 않다. 사람들도 찍고 싶었지만, 쉽사리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었다. 대신 내가 글로 찍어서 이곳에 옮겨본다. 내가 찍은 사진들은 하나같이 평범하다. 그래도 산책자인 나에겐 우연히 만난 소중하고도 의미 있는 장면들이다.



하나. 산책하다 만난 하늘

+) 주택가 사이에 하늘은 더 푸르게 느껴진다. 그리고 하늘공원에 올라가서 본 하늘들.

+) 마지막은 장마 후에 찾아온 분홍 하늘. 하 확실히 사진보다 실제로 보아야 아름답다. 폰으로는 도무지 담을 수가 없다. 해가 지는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매직아워라고 한단다. 분홍 하늘을 만났을 때, 나는 매직아워를 눈으로 보았다.



둘. 산책하다 만난 꽃들

+) 봄에 핀 벚꽃과 비와 함께 찾아 벚꽃엔딩


+) 여름 길목에 핀 이팝나무와 라일락. 보라색을 좋아하는 나는 라일락을 너무도 좋아한다. 낮에 핀 라일락도 예쁘지만, 밤에 핀 라일락이 더 좋다. 골목길로 나를 이끄는 그 달콤한 향기가 아주 정신을 못 차리게 한다.

 

+) 초여름 장미와 늦여름 나팔꽃



셋. 산책하다 만난 별별 것들

+) 홍대 한복판에서 만난 대왕 거북이, 그리고 대왕 거북이의 포스에 겁먹은 푸들.


+) 솜이불 뭉치를 타고 어디론가 날아갈 것 같은 버려진 곰인형과 낙엽 위를 헤엄치는 붕어빵.


+) 우리 동네 파출소에 사는 고양이. 그리고 바닥에 뜬 무지개


+)누군가 주차금지 막대에 꽂아놓은 꽃 뭉치, 그리고 아티스트 이효열의 설치 예술 '뜨거울 때 꽃이 핀다'



넷. 산책하다 만난 계절

+) 그래, 이제 곧 가을이 다가올 거야.




다섯. 산책하다 만난 사람들


우리 집 앞에 털보 고물상 아저씨와 국가기능사 세탁 명인 아저씨, 그리고 슈퍼 주인집 아저씨는 매일 슈퍼 앞에 앉아서 막걸리를 마시거나 장기를 두신다.


지난 나의 글 '수요일의 누룽지'에 나왔던 까칠한 고양이 누룽지와 볼 빨간 아저씨도 종종 마주친다. 아, 그리고 또 한 마리의 고양이를 발견했다. 바로 우리 동네 파출소에서 만났다.


우리 동네 파출소 경찰 아저씨들은 고양이 한 마리를 애지중지 키우신다. 예쁘게 생긴 치즈태비 고양이인데, 나는 녀석이 암컷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고양이는 대낮엔 경찰차 본네뜨 위에 엎어져 잠을 자거나, 파출소 대문  떡하니 지키고 앉아 있다. 밤에는 파출소 지붕에 올라가서 야옹야옹 울다가, 파출소 대문 앞에 엎어져서 존다. 경찰 아저씨들을 그저 싱글벙글 그 고양이만 쳐다본다. 정말 사랑이 넘치는 파출소다.  


어떤 할머니는 되게 멋지게 생긴 사륜차, 일명 사발이를 끌고 다니신다. 몸집의 두 배는 족히 넘는 짐을 가득 싣고서는 골목을 누비신다. 잔뜩 인상을 쓴 무표으로 사발이를 거칠게 운전하는 모습이 내추럴 본 라이더시다.  


재활용정거장에 모아놓은 쓰레기 뒤지는 아줌마도 계신다. 좀 겸연쩍은 듯 눈치를 보시면서 재빠르게 쓰레를 뒤지시는데, 한 번은 안경통에 든 안경을 발견하시곤 만족스럽게 쓰고 돌아가셨다.


초등학교가 끝날 시간이면, 애들이 옹기종기 집 앞 굴다리 밑에 모인다. 주차하 차들이 오가는 길목이라 위험할 법도 한데, 굴다리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서 논다. 니들 위험해. 말해도 코빼기도 안 듣는다. 굴다리는 바람길이라서 한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이 분다. 시원하고, 목소리도 왕왕 울리고, 아슬아슬하고, 사람들의 이목도 집중 아마도 아이들에겐 특별한 아지트인가 보다.   


막대기로 바닥을 두드리며 걸어가는 시각장애인들도 자주 목격한다. 동네 어딘가에 시각장애인들이 모여서 음악을 하는 곳이 있는 모양이다. 하나같이 어깨에 커다란 기타를 거나, 손에 네모난 가방을 들고 간다. 불쑥 차가 튀어나오기도 하는 위험한 골목길이라 나는 천천히 뒤를 따라가며 지켜보곤 한다.  모두 넘어지거나 길을 잘못 드는  . 탕탕탕, 바쁘게 막대기를 두드리, 천천히 갈 길을 잘 찾아간다.


아, 브라질 음악을 하는 청년들 무리도 종종 본다. 나시티, 반바지, 쪼리. 단출한 옷차림에 자기 몸집만 한 레게머리를 길게 늘어뜨리 몹시도 스웩이 살아있는 걸음걸이로 걷는다. 초록과 노랑의 강렬한 콜라보레이션으로 라카칠이  작은 트럭에 사운드 장비를 나르는 모습도 가끔 보았다. 알고 보니 무한도전에도 나온 적이 있는 유명한 타악기 연주팀이라고 했다.  


좁은 골목길 한 편에는 간판도 없는 허름한 구제 옷가게가 있다. 딱 보기에도 ‘메이드 인 차이나’하고 주장하는 옷들이 잔뜩 쌓여있. 가게 주인인 대머리 아저씨는 매일 제네시스를 끌고 와 옷가게 앞에 대놓는다. 그 제네시스가 주인아저씨의 차라는 걸 알게 된 것도 얼마 전 산책길에서였다. 제네시스를 주차한 아저씨는 가게 문을 활짝 열어 놓고선 제네시스를 흐뭇하게 쳐다보신다. 분명히 따로 애칭이 있을 것이다. 그게 뭘까. 나는 궁금하기만 하다.


유모차를 끌고 가며 "은비야, 앉아야지. 말 잘 들어야지. 엄마한테 혼난다." 늙은 개 은비와 이야기를 나누며 시장을 오가는 백발 할머니도 자주 마주친다.


두 블록 더 걸어간 골목길에서 죽집을 하는 주방장 아저씨는 가게가 끝나면 문을 닫고 작은 불 하나만   색소폰을 연주하신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콧수염을 기르신 폼이 아티스트 같으시다.


얼마 전에는 바로 옆 골목에 조그마한 냉면집이 신장개업을 했다. 냉면집 사장님은 조리복을 근사하게 빼입으시곤 일류 주방장 포스를 풍기며 자신의 가게를 쳐다보고 서 계셨다. 감개무량한 얼굴이었다. 가게 앞에 놓아둔 돼지머리가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사장님은 진지한 몸짓으로 빳빳한 만 원 한 장을 접어 돼지 콧구멍에 끼워 넣으셨다. 그리 오랫동안 무언가를 비셨다.

 




나는 <우연한 산보>를 다시 한 번 읽었다. 카페에서 책을 다 읽었을 땐 오후 6시. 창가에서 햇빛이 쏟아졌다. 불현듯 나는 산책을 결심했다. 나는 종아리까지 닿는 롱스커트에 흰 스니커즈 차림이었다. 통이 좁은 스커트 때문에 보폭도 좁았다. 하지만 오히려 천천히, 그리고 오래 걸을 수 있어서 좋았다.


저녁이 내려앉는 길목. 나무-햇빛 그림자를 밟으면서 나는 작은 풀잎과 하얗고 여린 꽃들과 쏟아지는 햇빛을 보았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고 나는 벅찬 행복을 느꼈다.

 


태평한 미아가 되어 보는 시간
온전히 살아 있음을 느끼는 시간



산책하는 바로 그 시간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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