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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간 기록한 작가노트에는

프롤로그

by 고수리

"너무 비장해지지 말자."


14년 차 작가는 매일 다짐합니다. 거대하고 무거운 마음에 짓눌려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지 말자고요.


그래서 오랫동안 사소하고 소소한 것들을 기록해 왔습니다. 인생보다 일상, 여행보다 산책, 유행보다 취향을 부지런히 모아둔 노트. '작은마음집'은 제가 15년간 기록해 온 작가노트의 이름입니다. 일기를 모아 책을 엮듯이, 벽돌을 쌓아 집을 짓듯이 매일매일 발견한 작은 마음을 틈 없이 튼튼하게 모아두려고 지은 이름이지요.


작가노트는 스마트폰과 노트북으로 24시간 연동되어 있습니다. 거리를 걷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책을 읽다가, 심지어 꿈을 꾸고난 아침에조차 뭉클, 무언가 내 마음을 움직였을 땐 노트에 갈급히 기록합니다. 오타 가득한 날 것의 기록들이어도 꾸준히 모으다 보니 어느덧 15년의 시간이 쌓였습니다.


글을 쓸 때면 언제나 작가노트부터 뒤적입니다. 일기와 사진첩, 밑줄 그은 문장과 단상, 습작과 플레이리스트까지. 감탄과 감정의 밀도가 조밀한 이야기들이 노트에 담겨있어요. 쓰려는 글의 주제나 소재를 키워드로 검색하면 시시콜콜한 15년 치 기록들이 전부 소환됩니다. 조르르 기록들을 더듬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경험과 생각을 마주할 때가 많아요. 이런 일이 있었다고, 이런 마음이었다고. 당시엔 모르고 지나쳤던 나를 이제야 제대로 만나보는 기분이랄까요. 마치 시간여행자가 된 것 같습니다.


신기한 건 이런 거예요. 당시엔 몹시 중요한 성취과 감정이라 여겼던 커다란 마음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오히려 사소하고 소소한 순간마다 느꼈던 작은 마음들이 지금의 나에겐 더욱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이 노트를 열어볼 때마다 깨닫습니다. 나라는 사람을 생생하게 살아있게 만드는 건, 작디작은 마음들이었구나.


14년 차 작가로 살다 보니, 저는 또렷한 기억보다 희미한 연필 자국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옮겨 적었던 작디작은 마음의 기록들이 지금껏 제가 쓴 에세이와 소설의 초고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일곱 권의 책을 만들 수 있었어요. 희미하더라도 부지런한 기록이야말로 작가를 계속해서 쓸 수 있게 합니다. 빈 종이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도록,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아무 일 없는 것 같은 평범한 하루에도 뭉클,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남들은 주목하지 않지만 나에겐 소중한 아주 작은 것들. 그런 것들을 날마다 발견하고 감탄하고 기록합니다.


어떤 작가는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매주 작가노트에서 고른 글을 다듬어 보냅니다. 실은 제가 꾸준히 쓰고 싶어서 시작하는 연재이기도 해요. 소수의 독자만 읽는 글이기에, 공개적인 지면에는 쓸 수 없었던 자유롭고 내밀한 이야기도 꺼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노트에는 심지어 20년 전 기록들도 있습니다. 열여덟 살 야자 시간에 썼던 미완성 소설도 있고, 스무 살 짝사랑에 실패하고 쓴 편지도 있어요. 그런 글을 꺼내기엔 아직 용기가 부족하지만요. 아무튼 훗날 제가 쓴 에세이와 소설에서 '작은마음집'의 흔적을 발견한다면, '이 글이 초고였구나.'하고 보물 찾기에 성공한 친구처럼 기쁘게 알아봐 주세요.


더불어 직접 찍은 사진을 메인 이미지로 두고, 글 쓰며 자주 듣던 노래들도 가끔 보내곤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이런 거. 제가 스무 살에 즐겨 들었던 노래가 있었어요. 아이리버 MP3에 넣어두고 짝사랑으로 속앓이만 하면서 혼자 듣던 노래. 유명하진 않지만 그래서 다행이다 싶은, 나만 알고 싶은 노래였죠.


그런데 가수랑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 거예요. 하필 팝송이어서 가사도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고요. 챗지와 알고리즘의 힘을 빌렸음에도 내내 찾을 수 없었는데, 글쎄 이 노트에서 찾은 거 있죠.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서 글을 씁니다. 어떤 노래냐면요... 다다음글쯤에 선물처럼 추신으로 보낼게요.


작은마음집에 꾹꾹 모아둔 작은 마음들이 있어요. 아직은 책이 되지 못한 작가의 내밀한 페이지를 보냅니다.

고수리의 작가노트 [작은마음집]입니다.



사진은 요가하러 갈 때마다 수련원 문가에서 반겨주는 손바닥. 작지만 고마운 힘이 차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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