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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Sep 30. 2015

수요일의 허니문

뜻밖의 우랄산맥, 결혼은 예고 없는 불시착 같은 것

2015년 2월 14일 저녁 5시

우리 커플은 3년 반의 연애 끝에 밸런타인데이에 결혼했다. 나는 결혼식이 이렇게 재밌는 건지 몰랐다.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또 한 번 했으면 좋겠어!' 앵콜을 외칠 정도였으니까. 베리베리 로맨틱한 밸런타인 웨딩마치- 우리의 결혼식은 아주아주 유쾌하고 즐거웠다. 그래서 우리의 허니문도 당연히, 아주아주 유쾌하고 즐거울 거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2015년 2월 15일 저녁 5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영하 10도 눈 내리는 우랄산맥에 도착해 있었다.


우리의 셀프웨딩  @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



제1탄. 파란만장 허니문의 서막! 뜻밖의 우랄산맥

첫 번째 목적지 : 프랑스 파리(X) → 우랄산맥 어딘가(O)



웰컴 투 유부월드! 유부월드에 들어선 경험자들은 모두가 입 모아 말했다.



결혼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신혼여행이야




여행.

우리에겐 아주 낯선 단어였다.


나는 삼일은 밤을 새우고, 하루는 죽은 듯 잠만 자는 방송작가였고, 남편은 월화수목금금금 칼퇴란 없는 영상 디자이너였다. 그런 이유로 우리의 3년 반 연애의 9할은 게릴라 심야 데이트였다. 어디론가 떠날 여유가 없었다. 제주도는커녕, 수도권 여행조차 제대로 가본 적이 없었다. 그랬다. 우리는 짐을 꾸릴 캐리어 하나 없는 생초짜 여행자였던 것이다.



죽기 전에 에펠탑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왠지 모를 비장한 각오로 우리는 12박 14일 서유럽 자유여행 콜! 을 외쳤다. 그리고 케케 묵은 여권을, 그야말로 방구석 어딘가에서 찾아들고선 야심 차게 파리행 항공권을 끊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바빠도 너무 바빴던 우리는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와, 새벽 1시부터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30인치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다. 사전도 아이패드도 없었다. 그나마 챙긴 건, 전날 산 미니 포켓 여행책자, 그거 달랑 하나뿐이었다.


짐을 꾸리고 나 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밤을 꼴딱 새울까 했다. 하지만 결혼식 긴장이 풀린 탓일까.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오 마이 갓! 지각이었다.


그야말로 멘붕! 무슨 정신으로 공항 갔는지 모르겠다.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전속력으로 인천공항을 뛰어다녔다. 발을 동동 구르며 티켓팅을 마치고, 설을 앞두고 인천공항을 점령한 요우커들을 제치고, 에스컬레이터와 셔틀 전철을 갈아타는 길고 복잡한 코스를 달려 가까스로 게이트에 골인했다. 탑승 시간 마감 1분 전이었다. 럭키!



땀범벅이 된 채 혼이 나간 얼굴로 가쁜 숨만 내쉬던 우리. 나는 지금도 상상해 본다. 만약에 우리가 그 비행기를 놓쳤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우리는 파리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마지막 승객이었다. 이제 12시간만 푹 자면 우리는 프랑스 파리 드골공항에 내리겠지. 봉쥬르 파리. 일단 바게트부터 사 먹어야겠어. 룰루랄라.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은 비좁은 좌석에 앉아있어도, 우리는 그저 꽁냥꽁냥 행복했다.



그리하여 봉쥬르, 파리!



... 는 개뿔. 우리가 도착한 곳은 영하 10도의 눈 쌓인 우랄산맥, 예카테린부르크 공항이었다. 


우랄산맥에 불시착한 파리행 비행기 @ 예카테린부르크 공항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현재 비상착륙을 준비 중입니다.



비행한 지 6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비상착륙을 하겠다는 기내방송이 나왔다. 그리고 그때, 정말 영화처럼 비행기 왼쪽 날개 죽지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기장이 말했다.


“연료를 버리고 있습니다. 연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연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치자, 그런데 연료는 왜 버리는 걸까? 우리는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좌석 모니터에는 온통 녹색 산들이 그려진 낯선 곳으로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겁에 질린 승객들에게 또 한 번 기내방송이 있었다.


“작은 결함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이어 비행기는 비상착륙을 시도했다. 비행기는 45도쯤 몸을 기울이고, 한동안 공항 위를 뱅뱅 돌면서 휘청 휘청거렸다. 누가 생각해도 '이건  비상착륙이구나.'라고 느낄 만한 매우 액티브한 동작이었다. 게다가 꼬리 칸 맨 뒷자리에 앉았던 우리는 흡사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을 경험했다. 얼굴은 태연했지만, 꽈악 맞잡은 손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비행기는 그렇게 이름 모를 공항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항공 수리에 들어갔다. 하지만 3시간을 기다려도 묵묵부답. 멈춰 선 비행기에 고대로 앉아만 있으려니 등에 땀띠가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슬슬 예약해둔 파리 호텔의 체크인 시간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승객들은 침착했다. 290명의 승객 중에 240명이 한국 승객이었는데, 누구 하나 따지거나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었다. 해외에서 한국 사람들은 조금만 늦어도 따지고 성질 내고 장난 아니라던데, 우리 비행기에 탄 사람들은 이후에도 쭉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내가 매우 감탄한 모습이기도 했다.   


잠시 후, 공항 관계자들이 승객들의 여권을 모두 가져갔다.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리라고 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비행기에서 내렸다.


눈 앞엔 눈 내리는 활주로가 펼쳐져 있었다. 칼바람이 뺨을 때리고 샤프카를 쓴 볼 빨간 직원들이 우리를 반겼다. 우리는 그때야 이곳이 어딘지 알게 되었다.



러시아였다.



우리는 공항 안에 있는 호텔로 이동했다. 도대체 무슨 문제인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물음에는 모두 모른다고 했다. 승무원들은 보이지 않았고 순 러시아 사람들밖에 없었다. 영어로도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았다.


호텔 로비에서 미약하게나마 와이파이가 터졌다. 승객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인터넷을 서치 했고, 몇 시간이 지나서야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을 알게 되었다.


상황은 꽤 심각했다. 한국에서 뉴스 속보로 떴을 정도니까.




우리가 비착륙한 곳은 러시아 우랄산맥에 위치한 예카테린부르크 공항이었다. 그리고 기내방송으로 말했던 작은 결함은, 무려 엔진 고장이었다. 왼쪽 엔진이 고장 났고 우리 비행기는 오른쪽 엔진 하나로 하늘을 날았다. 공항에는 소방차들도 출동해 있었다고 했다. 자칫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헐, 대박! 죽을 뻔했네. 사람들은 너도나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어떡하지? 우리는 하염없이 비행기 상황만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결국, 아무 통보도 없이 다음 날 오후까지 호텔에 묶여 있어야 했다.


이왕 러시아에 와봤으니, 러시아 땅이라도 밟아볼까 했다. 하지만 호텔 문을 지키고 선 경찰들 때문에 우리는 호텔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러시아는 비자가 없으면 입국이 불가한 나라이기 때문에 승객들의 여권을 가져가고 호텔에 묶어둔 것이었다.


+) 예카테린부르크 공항, 그리고 우리가 묵었던 공항 호텔(Liner Airporthotel Ekaterinburg). 외경은 이랬다고 한다. 하지만 "No Photo"를 외치는 관계자들의 호위 또는 감시(?) 아래 차만 타고 이동했던 우리는, 공항과 호텔의 모습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반감금(?) 상태로 우리는 석식을 먹었다. 정말 맛이 없었다. 식당도 매우 비좁아서 모르는 사람들과 합석해서 밥을 먹었다.


"우린 결혼 10주년 여행을 왔는데, 스페인행 비행기를 놓쳤어요."


우리와 함께 식사했던 한 부부는 결혼 10주년 기념 여행을 왔다고 했다. 파리는 경유지일 뿐이고, 목적지는 스페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비행기 불시착으로 스페인행 비행기를 놓쳐버렸다고 했다. 물론 숙소도 함께.


우리처럼 허니문을 온 신혼부부들도 아주 많았다. 대부분 5박 7일 일정으로 온 그들에게는 하루 일정 펑크는 엄청나게 큰 타격이었다. 휴가로 3박 파리 여행을 온 친구들도 있었고, 세미나에 참석하러 온 교수님도 있었다.

 

+) 석식과 조식. 정말 맛없었다. 더욱이 불행한 건, 이것이 허니문에서의 첫 끼였다는 것.  



발이 묶인 모든 승객은 숙소나 비행기를 놓쳤고, 여행 일정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게다가 맨몸뚱이로 그냥 뚝 떨어진 바람에 세면도구나 물도 없었다. 호텔 매 비스무리한 가판대는 금방 동났다. 그나마 칫솔과 치약을 구한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비행기 관계자들은 떠나는 순간까지도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았다.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서 비상착륙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떠한 공지도, 상황 정리도, 이후 보상도 제대로 하지 않은 항공사의 태도는 정말 최악이었다.


러시아 우랄산맥에 불시착한 승객들은 그렇게, 저마다 불행한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 이동하는 차 안에서 휴대폰으로 찍은 공항 풍경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눈과 우리뿐.



꿈에 그리던 허니문의 첫날 밤이었다.

우리 부부는 이름 모를 외딴 땅에 불시착했다. 비행기는 언제 다시 탈 수 있을지 몰랐고, 이미 파리의 숙소와 일정은 반 토막이 났다. 게다가 씻을 세면도구조차 없다니. 몹시 불행하고 찝찝한 밤이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커피나 마셨다.


호텔 식당은 밤이 되자 바(bar)로 변신했다. 우리는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눈 쌓인 창밖을 바라보면서 아메리카노와 카푸치노를 마셨다.


러시아의 밤은 빠르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하얀 눈 때문인지, 러시아의 밤은 깜깜하단 느낌보다 파르스름하니 환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한 지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도 벌써 일 년은 함께 산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 일 년 치 불행을 다 합쳐도 오늘만 못할 거 같아.


1분을 남기고 아슬아슬하게 탑승한 비행기가 한쪽 날개로 날아서 러시아 우랄산맥에 불시착하다니. 재난 소설 첫 페이지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우리 부부는 그저 황당하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자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커피잔을 짠 부딪치고, 한 모금 삼켰다. 정말 더럽게 쓰고 더럽게 맛없었다.


“진짜 맛없어!”

“최악이야!”


우리는 마주 보고 와하하 웃었다.


파리 여행 일정은 반 토막이 났지만 그래도 살아서 다행이고, 대신 아무나 못 가보는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라는 곳에도 와봤으니 꿀잼이고, 결혼하자마자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우린 어마어마하게 잘 살겠네!


우리는 반쯤 불행했지만 배로 행복했다.



스파시바, 러시아! 유쾌한 밤이었다.

 

+) 우리 부부의 나름 유쾌한 첫날 . 우리는 반쯤 불행했지만 배로 행복했다. 스파시바, 러시아!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승객들은 새로 도착한 파리행 비행기를 탈 수가 있었다.


밤새 로비에 모여서 실시간 정보를 주고받다 보니, 승객들은 원래 알던 사람들처럼 꽤 친해졌다. 영어가 유창한 사람들은 카운터나 관계자들과의 대화를 도왔고, 중요한 정보들은 한국말로 번역해 로비에 부착해 두기도 했다. 틈틈이 각자 여행사와 메일을 통해 얻은 정보들을 공유하고, 좁은 식당 자리를 내어주고, 간식들을 나눠 먹기도 했다. 승객들은 침착하고 질서 정연하게 하룻밤을 지냈다. 그런 모습은 뿌듯했고 맘 속에 뜨끈한 동지애를 불러일으켰다.


+) 예카테린부르크 공항 풍경. 비행기는 단 한  대뿐이었다. 우리가 공항을 통째로 빌린 것 같았다.



꼬박 하루를 기다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우린 다시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향했다. 여섯 시간쯤 날아서 파리 드골공항에 도착했다. 착륙을 앞두자 비행기 안은 다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전 비행의 트라우마인지, 나도 등골이 오싹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쿵. 드르르르.

비행기 바퀴가 안전하게 프랑스 땅에 닿았다. 그러자 모든 승객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살았다!




우린 살았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 허니문 꼴라주 첫 번째 조각

파란만장 허니문의 서막! 뜻밖의 우랄산맥

불행이 눈보라처럼 몰아쳤던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의 추억


우리의 허니문은 마치 앞으로 벌어질 결혼생활의 축소판 같았다. 두근두근 개봉일을 기대했건만, 우리의 결혼은 로맨틱 무비가 아니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스펙터클 재난 영화와 웃픈 코미디 영화의 조합이랄까. 시작부터 불행이 사방에서 눈보라처럼 몰아쳤고, 우리는 고장 난 비행기를 타고 우랄산맥에 뚝 떨어졌다.



결혼은 예고 없는 불시착 같은 것



그럼에도 웃을 수 있는 건 우리가 함께라는 것.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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