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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Oct 01. 2015

목요일의 어른 친구

쉰한 살의 어른 친구, 어른에게도 위로는 필요해

내게는 조금 나이가 많은 친구가 있다. 올해로 쉰 하나. 우리 엄마보다 한 살이 어리다. 나는 그녀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9년 전, 선생님과 제자 사이로 만났다. 친구는 외래 교수님이었고, 나는 그녀의 수업을 듣던 제자였다. 어떤 계기로 우리는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떠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학교 도서관이 문 닫을 때까지 남아, 그녀의 집필 작업을 돕거나 예술이나 인생, 연애에 관한 낭만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마지막으로 불 꺼진 도서관을 나섰다. 갑자기 앞서 걷던 선생님이 멋지게 빙글 돌았다. 그리고 손을 척 내밀었다.


“수리야, 난 정말로 너랑 친구가 되고 싶다. 선생님과 제자 말고, 진짜 친구.”


선생님의 고백은 설레고 뭉클했다. 내민 손을 나는 기꺼이 붙잡았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내가 스물하나, 선생님이 마흔둘. 우리는 21년이란 시간을 훌쩍 넘어서 친구가 되었다.



내가 선생님을 좋아하고 따랐던 이유는 우리 엄마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예뻤다. 지적이고 우아한 매력이 넘쳤다. 언제나 당당하고 단정했다. 그리고 선생님도 혼자 딸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었다.


일하는 싱글맘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다. 혼자서 가장이자 엄마가 되어야 했던 선생님은 툭하면 밥을 걸렀고, 늘 정신없이 바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의 몇 배를 해내야 했기에, 일상 과부하가 걸렸고 깜빡하고 덜렁대기 일쑤였다.


선생님은 백조 같았다. 밥벌이의 세계에서, 우아한 날개를 펼치고 홀로 유유히 떠다니는 아름다운 백조였다. 하지만 숨겨진 흙탕물 아래에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발장구를 치고 있었다. 종종걸음이 몸에 밴 선생님의 발은 부르트고 아팠다. 그 속도 새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그 당시에 우리 엄마도 그랬다. 엄마 혼자 우리 남매를 키우느라 아주 힘든 시기였다. 엄마는 밥을 거르고 일하고, 잠을 안 자고 일했다. 아마도 난 선생님에게서 우리 엄마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선생님을 챙겨주고 싶었고, 뭐든 곁에서 돕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는 막역한 사이로 자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9년이 흘렀다. 스물한 살이었던 나는 서른 살이 되었고 선생님은 여전히 바쁜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새 사회 물을 좀 먹었고 셈에 밝은 어른이 되었다. 선생님은... 나는 선생님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치열하게 동동거리며 나 살기에 바빴다. 우리의 만남은 데면데면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나와 함께 작업한 책이 벌써 몇 쇄를 찍었다고, 새 판이 나왔는데 만나서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따로 부탁하고 싶은 일도 있다고 했다. 하필 나는 바빴다. 그리고 마음도 힘든 시기였다. 나는 선생님과의 약속을 미루고 미뤘다.


선생님께 몇 번째 연락이 왔던 날, 비로소 나는 선생님을 만났다.


부탁할 것이 있어.


나는 그 말이 내내 맴돌았다. 한숨부터 새어 나왔다. 내 일도 힘들어 죽겠는데, 어떤 부탁을 하시려는 걸까. 솔직히 만나기가 부담스러웠다. 선뜻 남을 돕고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 이제는 버겁다고 느껴졌다.



선생님은 약속 장소에 나보다 먼저 와계셨다. 으레 밝은 얼굴과 경쾌한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선생님은 밥과 커피를 사주셨고, 새 판을 찍은 빳빳한 새 책을 선물로 주셨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나는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봤다.  


“선생님, 저 30분 있다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부탁이라고 하셨던 거, 뭐예요?”

“벌써 가려고? 아, 그게 말이야...”


선생님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떼셨다.



내 이야기 좀 들어 줄래?



아.

나는 예상치 못한 선생님의 말에 조금 놀랐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딸과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제 스물다섯이 된 딸은 선생님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고. 얼마 전 힘든 일을 겪었는데, 자신을 몰아붙이는 사람들 앞에서 딸이 엄마에게 버럭 화를 냈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내 편이 아닐 때, 그래도 딸만은 내 편이었으면 좋겠는데. 사람들과 똑같이 내 탓을 하는 딸에게 선생님은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나는 언젠가 선생님 딸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너어무 예쁠 때다. 그땐, 연애를 정말정말 많이 해봐야 해. 남친은 있어?”

“언니, 전 돈도 없고 아빠도 없고 빽도 없는데 어떻게 결혼해요? 대체 누가, 아무것도 없는 저랑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제가 혼자서 그 모든 조건을 다 채워야 하는데... 엄마도 챙겨야 하고요.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 진지하게 남자를 못 만나겠어요.”


나는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혔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 아빠 없이 가난하게 자란 딸은 언제부턴가 그게 트라우마가 되었던 거다.


알고 보면 싱글맘을 둔 딸도 상상 이상으로 힘들다. 엄마가 혼자서 열심히 나를 키운 건 알겠는데, 엄마가 너무너무 고맙고 짠한 건 알겠는데, 그래서 암말도 못하겠는데, 그래도 나는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다고. 어디에도 토로하지 못하는 복잡하고 먹먹한 마음을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과 딸이 겪었던 이 갈등을 엄마와 나도 겪었었다. 내가 복잡한 마음을 부여잡고 온전히 엄마의 편으로 서기까지, 얼마나 힘든 속앓이가 있었던가. 나는 선생님을 마주 보았다.


모두가 돌아서도 딸은 엄마 편이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나도 내가 잘못한 건 아는데... 딸마저 돌아서니까 진짜 맘이 너무 아팠어.”


“선생님, 딸이 아직 어려서 그래요. 분명히 진심은 아녜요. 마음이 엄청 복잡할 거예요.”

“나도 알아... 아니, 그래도. 내가 걜 어떻게 키웠는데...”


“그럼요. 선생님, 정말 힘드셨잖아요.”

내가... 이걸 털어놓을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야.


“알아요. 알죠, 선생님.”


누구보다 우아한 모습으로 바삐 걸어가던 선생님의 깡마른 뒷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코끝이 찡해졌다. 그때,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선생님은 아이처럼 와아앙 울음을 터트렸다. 지켜보는 나도 찔끔 눈물이 났다.


“너, 왜 울어.”

“선생님이 울잖아요.”


“아니, 난 네가 우니까 자꾸 눈물이 나잖아.”

“저도 선생님이 우니까 막 눈물이 나잖아요.”


“야, 울지 마.”

“선생님이나 울지 마요.”


환한 대낮 백화점 카페에서 우리는 엉엉 울고 말았다. 서로 티슈를 건네주며 찔끔찔끔 눈물을 닦았다. 눈물을 닦다가도 서로 눈이 마주치면 또 와앙. 주책없이 눈물이 났다.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총이 따끔따끔했다.


쉰한 살의 어른이 내 앞에서 아이처럼 우는 모습은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애처롭고 짠하고 예뻤다. 아기처럼 달래 주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속내를 꽁꽁 싸매다가 결국 터져버린 어른의 울음에는 표현 못할 수많은 감정이 들어있었다.  


천경우 작가의 Versus #4


그래도 울고 나니 개운했다. 선생님은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는데 울고 나니 좀 쉬고 싶다고. 찜질방이나 들러야겠다며 총총총 걸어가셨다. 나는 저 멀리 사라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 엄마도 힘들 땐 혼자 사우나에 가요. 땀도 마음도 쫙 빼고 돌아오면 그렇게 개운하대요. 어쩜, 선생님은 스트레스 푸는 방법도 우리 엄마랑 똑같네요.


그리고 나는 부끄러워졌다. 나는 선생님을 어른이라고만 생각했다. 우리는 친구였는데. 21년의 시간도 훌쩍 뛰어넘은 각별한 친구였는데. 각자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혼자서 몹쓸 어른이 된 양, 우리 사이를 계산하고 있었다.


어른에게도 친구는 필요하다. 그리고 어른에게도 위로는 필요하다. 어른 친구를 위로하는 방식도 다른 건 없다.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 그냥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렇게 함께 울어 주는 것. 그거면 된다.   


돌아오는 길, 그간 울적했던 내 마음도 말랑말랑해졌다. 이상했다. 기분은 좋은데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9년 전 선생님이 내민 악수의 의미를 나는 이제야 알겠다. 나는 그날 진짜 친구 한 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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