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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Oct 07. 2015

수요일의 허니문

파리, 엄청나게 쓸쓸하고 믿을 수 없게 무심한 허니문

수요일의 허니문 제1탄. 뜻밖의 우랄산맥

https://brunch.co.kr/@daljasee/62


우린 살았다!


파리 드골공항 착륙과 동시에 승객들은 뜨거운 박수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우린 외교부에서 보낸 긴급 메시지를 받았다.



프랑스 대테러 경보단계 최상급 유지 중
신변안전에 각별한 주의 요망



아!

파란만장한 허니문의 불행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2. 파리, 엄청나게 쓸쓸하고 믿을 수 없게 무심한 허니문


어쩌다 보니 허니문의 두 번째 목적지

: 프랑스 파리(X)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O) 프랑스 파리(진짜!)


우리가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건 2월 17일.

당시는 프랑스 언론사 테러사건과 니스 군인 피습사건으로 프랑스 시국이 몹시 흉흉하던 때였다. 급기야 우리가 파리에 도착하기 전, 2월 5일부터 프랑스 대테러 경보단계가 최상급으로 격상되었다.


드골공항에 내리자마자 발견한 건, 바게트가 아니었다. 바게트 대신 커다란 총을 든 경찰들이었다. 새까맣게 완전 무장한 프랑스 경찰들이 공항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경찰들이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괜히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불시착의 여운 때문에 가뜩이나 소심해진 멘탈은, 어느새 비눗방울 멘탈로 바뀌었다.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멘탈.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벌써 저물어 가는 허니문의 둘째 날. 우린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뱉었다.



우린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거야



하지만 불평할 시간이 없었다. 일단 제대로 씻고 침대에 눕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호텔을 찾아 체크인을 해야 했다. 우린 이틀 만에 상봉한 캐리어를 질질 끌고서 전철을 탔다.


+) 빈티지하고도 낭만적인 파리 전철


까만 밤, 전철을 타고 가며 우리는, 낯선 냄새와 낯선 외국어와 낯선 야경을 느꼈다. 긴장되고 설렜다. 우리가 드디어 파리에 도착했구나. 맞잡은 우리의 손과 손 사이로 찌르르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파리의 밤을 느끼고 있었다.


허니문의 셋째 날, 창밖의 파리 풍경 @베르시의 작은 호텔


우리는 파리 베르시에 위치한 작은 호텔에 이틀 동안 머물렀다. 아침 일찍 부리나케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이런 풍경이 펼쳐졌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좋은 건가? 멋진 건가? 좀 별로인 거 같은 건, 나만의 생각이겠지?


늦은 밤에 체크인하느라 몰랐었는데, 우리 방은 에펠탑이 보이는 반대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문을 열면 파리의 민낯이 보였다. 꾀죄죄한 뒷골목과 평범한 건물들, 공사장이 그냥 퉁. 놓여 있었다.


색채가 없는 쓸쓸한 인상의 회색 도시.

예쁘진 않지만 퍽 정감 간다고 해두자.


나는 빙그레 웃으며 커튼을 닫았다.

나중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내가 처음 본 창밖의 풍경은 파리의 강력한 스포일러였다.


본격적인 파리 여행기에 앞서,

본격적인 파리 여행기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여행기에 앞서 미리 스포일러를 알려주자면.

이제 여러분은 아주 쓸쓸하고 아주 별 볼 일 없는 파리의 모습을 만날 것이다.


하필이면 겨울이었고 하필이면 대테러 경보단계 최상급인 시기였으며 하필이면 일정이 촉박했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추위에 떨었고 매번 쓸쓸했으며 매번 좌절했다.


+) 텅텅 빈, 루브르 박물관


제일 처음 찾아간 곳은 루브르 박물관이었다. 하지만 주변에는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이 없었다. 알고 보니 박물관 휴관일이었다. 예상치 못했다. 그래도 하루 일정이 남았으니 다른 박물관도 가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뮤지엄 패스 2일권을 샀다. 42유로씩, 총 84유로였다.


러시아 불시착으로 하루 일정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하지만 그저 허허실실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파리에서 하루가 없어진 건, 실로 엄청난 손해였다. 우리는 길고 긴 대기 줄을 기다려 미술관을 구경할 기회와 파리 근교를 여행할 기회와 쇼핑을 할 기회를 모두 날려버린 것이다.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단 이틀 안에 파리를 여행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  


+) 세느강변 풍경들


우리는 세느강변을 걸으면서 생각했다.


파리는 정말 춥구나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 파리에는 해가 뜨지 않았다. 차가운 겨울바람만 세차게 불었다. 대테러 경보가 내린 비수기 여행지에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없었다. 앙상한 나뭇가지와 오래된 건물들, 꽁꽁 걸어 잠근 상가들과 무뚝뚝한 현지인들. 겨울 파리는 그랬다. 우리는 칼바람을 맞으면서 탁한 강물이 넘실거리는 세느강변을 따라 걸었다. 만지면 바스락 소리가 날 것 같은, 춥고 건조한 풍경이었다.  


잠시 아침으로 돌아가 보면, 베르시에 위치한 숙소에서도 나오자마자 세느강변이 보였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신나서 뛰어나온 우리는 처음에 미친 생각을 했다.


세느강은 파리를 관통하는 커다란 물줄기니까, 세느강변을 따라 걸어가면 우린 파리 중앙까지 갈 거야. 세느강변을 따라서 쭉 걸어가 보자!


하지만 세느강의 칼바람을 맞으면서 한 시간을 걷고 나서야 이게 미친 생각이었다는 걸, 온몸으로 체감했다. 손, 발, 귀가 다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너무 추워서 눈물이 났다. 정말이지 파리는 춥고 춥고 또 추웠다. 오죽하면 스위스 융프라우에 올랐을 때, 파리보다 훨씬 따뜻했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 로댕의 정원


골목을 걷다가 우연히 로댕의 정원을 발견했다. 파리는 내숭이 없는 도시였다. 그냥 주거지 같은 골목  사이사이에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나,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이 툭 놓여 있었다. 하지만 로댕 미술관도 문을 닫았다. 그래서 우리는 입장료 1유로를 내고 로댕의 정원을 거닐었다.


로댕의 정원에서 마주한 조각 작품들. 이번 여행에서 유럽 박물관들을 다니면서 크게 느낀 것이 있다. 실제로 만난 조각 작품들은 어마어마하게 멋지다는 것. 사진으로만 접했을 땐 몰랐는데 조각들을 막상 코앞에서 보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우라라는 게 이런 거구나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표정과 동작을 가진 조각들은, 날씨와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늙어갔다. 변색하고 마모되고 몇몇은 훼손되었음에도 깊이 있고 아름다웠다. 조각품들도 나이를 먹는다. 나이 든 조각들을 감상한다는 건, 마치 몇백 년을 산 노인을 마주하는 것처럼 경이롭고도 벅찬 경험이었다.


+) 오랑주리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 여행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공간이었다. 이곳에 모네의 작품 <수련> 연작이 있었다. 오랑주리 미술관에도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대기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바로 미술관에 입장했다. 미술관에 들어서자마자 타원형 전시실 사방이 모네의 <수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늦은 오후에 찾아간 오랑주리 미술관은 완벽했다. 유리 천장에서 희미한 오후의 빛이 연약하게 쏟아졌다. 그 빛에 따라 그림이 묘하게 변했다. 마치 바다가, 지는 햇빛에 반짝이며 일렁이는 것처럼, 모네의 <수련>이 빛과 함께 일렁거렸다.


우리는 한동안 모네의 <수련>으로 둘러싸인 전시실 중앙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림을 감상했다.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우리만 덩그러니 그곳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청명한 아침의 연못에 핀 수련, 땅거미 질 무렵의 연못에 핀 수련, 물에 비친 반영에 핀 수련. 로댕의 조각을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모네의 그림은 날씨와 시간에 따라 때때로 변했다. 유리 천장에서 쏟아지는 그날그날의 빛에 따라 매일 다른 수련이 피었다.


모네 <수련> 연작 @오랑주리 미술관


남편과 손은 맞잡고 앉아서 모네의 <수련>을 보고 있노라니, 지금 이 순간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행복한 순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모든 시간과 날씨와 빛이 우리를 지금 이곳으로 이끌었다고. 그동안의 연쇄적인 불행들이 촘촘히 엮이고 엮여서 결국 우리를 지금 이곳으로 이끌었다고. 이게 운명이 아니면, 대체 뭐라고 설명할 거야?  


모네의 <수련>을 감상하던 그때,

우리들의 완벽하게 행복한 순간이었다.


2일권 뮤지엄 패스를 구입한 것도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우리는 84유로짜리 뮤지엄 패스를 오랑주리에서만 사용했으니까. 하지만 모네의 <수련> 연작을 보기 위해 84유로를 썼다고 해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오랑주리 미술관 내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인 줄 알고, 사진을 찍지 못한 것도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하지만 사진을 찍느라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우린 그 경이로운 순간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게 운명이었다. 행복했다.


+) 에펠탑 아래에서 올려다 본 에펠탑



죽기 전에 에펠탑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그래서 파리에 왔는데, 죽기 전에 본 에펠탑은 덩그러니 서 있는 철골 구조물이었다. 어딘가 스산해 보이기까지 했다. 처음 에펠탑이 생겼을 땐, 파리 시민들의 철거 요구가 빗발쳤다고 한다. 예술의 도시 파리에 ‘추악한 철 덩어리’가 세워져 있다며 비판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좌) 샹 드 막스 공원에서 본 에펠탑 / (중간, 우) 바토무슈에서 본 에펠탑. 시간에 따라서 에펠탑의 모습이 달라진다.


하지만 밤이 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우린 네 번, 에펠탑을 찾았다. 첫 번째는 샹 드 막스 공원에서 저 멀리 우뚝 선 에펠탑을 보았다. 두 번째는 에펠탑 아래에서 에펠탑을 올려다보았다. 세 번째는 유람선 바토무슈를 타고 해 질 녘의 에펠탑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샤이요 궁에 올라서 에펠탑의 야경을 보았다.


샤이요 궁에 올라 바라본 에펠탑 @샤이요 궁


단연코 네 번째 에펠탑이 가장 아름다웠다. 깜깜한 밤, 상쾌한 밤공기를 마시며 샤이요 궁에 오르자 파리 한가운데 보석처럼 빛나는 에펠탑이 서 있었다. 에펠탑은 죽기 전에 꼭 보는 게 맞다.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파리의 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황홀한 광경이 거기에 있었다.


+) 몽마르트르 언덕


난 몽마르트르에서는 별 감흥이 없었다. 파리를 여행해본 사람들에겐 엄청난 비난을 살 수도 있다. 파리의 모든 로망과 예술은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시작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는 파리에서 유일하게 상업화(?)된 몽마르트르가 불편했다. 기념품과 그림, 상가들의 호객행위가 몽마르트르에선 유독 심했다. 성수기에는 몽마르트르 말고도 에펠탑에서도 심하다고 했다.


그러나 몽마르트르 언덕을 오르는 계단과 주거지, 그리고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파리는 좋았다. 궂은 날씨 때문에 파리 시내의 절반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희붐한 안개에 뒤덮인 파리의 저녁은 그것대로의 분위기가 있었다. 앙상한 겨울 풍경도 한데 어울려 한껏 외롭고 쓸쓸했다. 코트 깃을 치켜세우는 가난한 예술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난생 처음 떠나 본 여행에서 알았다. 여행 취향이라는 게 정말 있다는 걸. 나는 모두가 극찬하는 베네치아가 최악의 여행지였다. 베니스의 상인들에게 얼마나 데었는지. 도시가 통째로 관광상품이 된 그곳에서, 나는 무엇을 제대로 보거나 생각하거나 느낄 여유가 하나도 없었다. 아름다움을 사고 파는 관광지는 내 여행 취향이 아닌 것 같다.  


나는 파리가 가장 좋았다. 쓸쓸하고 자연스러운 거리 곳곳이 좋았다. 여행객들에게 무심한, 아니 무뚝뚝할 정도로 간섭을 하지 않는 파리지앵들도 좋았다. 차분하고 오래된, 내숭 없는 민낯의 풍경을 간직한 이 도시가 정말로 좋았다.


+) 프랑스 가정식 레스토랑 Le Petit Pontoise (르 쁘띠 뽕뚜와즈)


파리의 마지막 밤은 프랑스 가정식 만찬으로 마무리했다. 해는 금방 떨어졌고 시내에서 벗어난 주변 거리는 좀 무서울 정도로 어두웠다. 아홉 시가 넘어서 우리는 미리 찾아둔 식당을 찾아갔다. 지친 우리를 위한 일용할 양식이 필요했다. 불 꺼진 거리에 홀로 반짝이는 심야식당처럼 조그마한 가게 하나가 반갑게 서 있었다.


기대하고 기대하던 프랑스 가정식을 먹었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이틀간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다. 줄어든 일정 내에 파리를 모두 돌아와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무거운 카메라와 짐을 짊어지고 거의 행군을 하다시피 걸었다. 겨울바람을 맞으며 걷고 또 걷고, 보고 또 봤다.


오랜만에 정성스럽게 요리된 따끈한 음식을 앞에 두고 있자니, 마음에 따뜻한 기운이 돌았다. 달팽이 수프, 그리고 와인을 곁들인 생선요리와 양고기 스테이크, 마지막으로 달콤한 디저트까지. 따뜻하고도 감사한 식탁이었다.     



걷다가 만난 파리의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아봤다.

사람이 없는 곳만 골라 찍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사람들이 없었다.

문 닫은 놀이동산을 찾은 어린애가 된 기분이랄까.

하지만 누구보다도 홀가분하고 즐겁게, 우리는 파리 곳곳을 걸어 다녔다.



엄청나게 쓸쓸하고 믿을 수 없게 무심한 도시, 파리의 겨울이 느껴지는가.

훌쩍 시간을 달려, 우리는 몇 백 년 전 파리를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런 도시에 산다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 노트르담 대성당


뽀앙 제로 @노트르담 대성당


노트르담 대성당을 둘러보고 우리는 뽀앙 제로를 밟았다. 노트르담 대성당 앞쪽에 있는 원점 포인트, 작은 맨홀같이 생긴 동그라미를 뽀앙 제로라고 부른다. 뽀앙 제로는 파리와 다른 도시 간의 거리를 측정할 때 기준점이 되는 곳이다. 뽀앙 제로를 밟으면 파리로 다시 돌아온다는 속설이 있다. 여러 번 비비면 안된다. 꼭 한 번만 밟아야 한다.


언젠가 우리, 따뜻한 계절에 다시 파리에 오자.

뽀앙 제로를 기준점으로 컴퍼스처럼 빙글빙글 돌아서 다시 파리에 오자.


엄청나게 쓸쓸하고 믿을 수 없게 무심한 도시, 파리.

시간이 흘러도 이 도시는 변함없이 쓸쓸하고 무심할 테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린 다시 파리를 찾아올 거야.


그땐 꽃과 나무가 파릇한 땅을 밟고 다니자.

마치 어제 떠난 것처럼 익숙한 길들을 걸어 다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는 설레는 눈빛을 교환하며 뽀앙 제로를 꾸욱 밟았다. 여러 번 말고 꼭 한 번만.  






+) 허니문 꼴라주 두 번째 조각

엄청나게 쓸쓸하고 믿을 수 없게 무심한 도시, 파리

연쇄적인 불행들이 우리를 완벽하게 행복한 순간으로 이끌었던 파리의 추억

테제베를 타고 떠나는 우리에겐 또 어떤 멋진 일들이 벌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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