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수리 Sep 29. 2015

소라

기억을 걷는 시간 5분 12초

 ▷ play


행복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나는 자주 그때를 생각해. 그때도 이 바람, 이 공기, 이 계절, 이 노래가 흐르고 있었어.

나는 정말로 자주 생각이 났어. 마음이 서걱거려 온종일 이 노래만 듣기도 했지.


아직도 너의 소리를 듣고, 아직도 너의 손길을 느껴.
오늘도 난 너의 흔적 안에 살았죠.
아직도 너의 모습이 보여. 아직도 너의 온기를 느껴.
오늘도 난 너의 시간 안에 살았죠.



H.

내 귀에 노래는 여전한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 아무 대답이 없어. 그래서 더 아련하고 애틋했어. 그런 너는 아름다웠어.


우리가 함께 행복했다고 생각했던 그때, 사실 너는 내 곁에 없었어.

나는 언제나 혼자였어. 깜깜한 밤,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면 그곳은 시린 밤공기와 희붐한 담배 연기 뿐이었지.  

     

지금도 난 너를 느끼죠 이렇게.
너를 부르는 지금 이 순간도 난, 그대가 보여.
내일도 난 너를 보겠죠. 내일도 난 너를 듣겠죠.
내일도 모든 게 오늘 하루와 같겠죠.


H, 거짓말은 쉬워.


“괜찮지?”

너는 운동화 뒤축을 고쳐 신으며 물었어.


“괜찮아.”

나는 웃었어.


쾅.

무거운 문이 닫히고 너는 사라졌어. 나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어.


외로웠


텅텅 탕탕 - 완전히 텅 비어버린 그 공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나는 한숨을 내뱉었어. 내 숨마저 사라지자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 그랬어. 내 거짓말의 기억은 사실 그랬어. 나는 혼자였고 괜찮지 않았어.   

     

길가에 덩그러니 놓여진 저 의자 위에도
물을 마시려 무심코 집어 든 유리잔 안에도
나를 바라보기 위해 마주한 그 거울 속에도
귓가에 살며시 내려앉은 음악 속에도
네가 있어.


H, 나는 너를 잘 알고 있었어.


네 말투와 행동, 심지어 네 생각까지도 모두 예측할 수 있었어. 나는 너에 관한 정확한 데이터를 줄줄 뽑아냈고, 그게 왠지 뿌듯했지.


그래서 그랬어. 모든 사람이 믿고 있는 데이터의 오류를, 나는 감히 인정할 수 없었어.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했어. H, 넌 늘 내 곁에 있었고 장난스러웠고 마음이 여렸고 웃음이 많았어. 넌 나의 소울메이트이자 최고의 보이프렌드였어.


하지만 너는 거기에 없었어. 나는 혼자였고 거짓말쟁이였어.


길을 지나는 어떤 낯선 이의 모습 속에도
바람을 타고 쓸쓸히 춤추는 저 낙엽 위에도
뺨을 스치는 어느 저녁의 그 공기 속에도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곳에 네가 있어.


H, 나는 남이섬에 가본 적이 없어.

그런데 누군가 남이섬에 관해 물으면,



"거기 참 예뻐요. 낙엽이 쌓인 길을 산책하면 정말 좋죠. 생각나네요. 바스락 바스락. 마치 발밑에 떨어진 별들이 부서지는 소리 같다고. 그 애는 그렇게 꽤나 낭만적인 애였죠. 그 길을 우린 한참이나 함께 걸었어요. 정말이지 그곳은 가을이 제일 예쁜 거 같아요."


나는 어디선가 보았던 사진과 이야기들로 기억을 만들었어. 우린 함께 남이섬을 걸었고, 사진을 찍고 즐거운 대화를 나눴어. 정말 좋았어, 남이섬. 그런 기억. 거짓말의 기억.  


랄라라 라랄라랄라
랄라라 라랄라랄라


H, 거짓말은 참 그래.  


가보지 않은 장소도 가본 것 같고, 해보지 않은 추억도 해본 것 같아. 너에 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서,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가본 것도 같고 만나본 것도 같고 해본 것도 같고 즐거웠던 것도 같아. 그렇게 부풀리고 부풀려서는 펑! 나는 행복했던 것 같아.


거짓말은 쉽고 달콤해. 정말 아무도 몰라.


어떤가요 그대, 어떤가요 그댄
당신도 나와 같나요.
어떤가요 그대


H, 나도 잘 모르겠어.


왜 그렇게 애써 너와의 기억들을 포장하려 했는지. 그냥 나는 그랬어.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어. 우리의 추억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었어. 어른스러워지고 싶었어. 내가 받을 수 없다면 내가 더 주고 싶었어. 나는 어떻게든 이 관계를 지키고 싶었어. 너와 함께 행복해지고 싶었어.


나는 왜 그렇게 간절했을까. 나는 왜 그렇게 불쌍했을까.


H, 네 기억 속에 난, 그렇게나 착하고 예쁘게 남고 싶었나 봐. 우리의 관계가 끝나고 서먹해진 후에도. 나는 과장하고 거짓말하면서 너를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어.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가 행복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 우린 아주 행복했다고.


헤어져도 우리 좋은 친구로 지내자. 헤어진 후에도 나는 네 걱정을 하고 네 안부를 묻고 너를 챙기고 또또 걱정을 했어. 왜 그랬냐고. 그러니까 나는...


어떡하죠 이젠, 어떡하죠 이젠
그대는 지웠을 텐데.
어떡하죠 이젠


H, 너는 내가 없으면 안 되는데. 네겐 나만큼 좋은 사람이 또 없는데.

 네가 나를 지우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H, 너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잘 지낼 거고 나를 잊겠지만.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우리가 어떻게 끊어질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우린 행복했었단 말이야. H, 이것도 거짓말이니?

     

그리움의 문을 열고 너의 기억이 날 찾아와.
자꾸 눈시울이 붉어져
어떡하죠 이젠.


H, 나는 언젠가 가을, 덜컹덜컹 기차를 달려 남이섬을 찾아갈 거야. 그리고 정말로 남이섬의 예쁜 가을 길을 걸을 거야. 초조했던 나의 거짓말이 진짜로 이뤄진다면, 그제야 나는 마음이 놓일 거야. 편안해지겠지.


그리움의 문을 열고 너의 기억이 날 찾아와.
자꾸만 가슴이 미어져
어떡하죠 이젠.


H, 그러니 너도 이제 그만 나를 찾아와. 내 거짓말 속에서 떠나 주렴. 넌 어디에도 없었던 사람, 진짜 나의 기억에서 빈 자리로 머물러 줘.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너를, 네가 이해하지 못했던 나를, 그래서 거짓말 같았던 우리의 시간을. 부풀리지도 나쁘게도 말고. 그냥 그때 우리로 기억하자.  


stop


H, 어느새 창밖은 분홍색이야.

아마도 지금은 가을빛이 저 멀리 사라지는 저녁쯤이겠지. 나는 눈을 감고 마지막 노래를 들었어. 5분 12초. 내 귀에 노래가 흐르는 동안, 잠시 네가 다녀갔어. 노래는 끝이 났고 나는 정지 버튼을 눌렀어.


텅텅 탕탕.

완전히 텅 비어버린 이곳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나는 한숨을 내뱉었어. 내 숨마저 사라지자 정말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나는 외롭지 않아.







넬_ 기억을 걷는 시간 https://youtu.be/HW5HU6o1eMA

매거진의 이전글 2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