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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Oct 16. 2015

금요일의 창작활동

어느 창작자의 부끄러운 창작활동

요 며칠 기업 홍보영상 제작 작업으로 바빴다.  

어쩌다 보니 나는 모 TV 제작국 국장님과 함께 영상을 만들게 되었다. 작은 제작국이라 국장 타이틀이 대단한 게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는 국장님은, 그래도 어쨌든 방송판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셨다.


저녁 식사 시간. 국장님은 숟가락 두 개로 고등어구이를 가르며 말씀하셨다.


“나는 이런 단순 작업이 좋아.”


국장님의 능숙한 손놀림에 고등어 살이 깔끔하게 발라졌다.


“창작하는 건 너무 힘들어. 게다가 이런 막무가내 클라이언트를 끼게 되면 정말 피곤하다구.”

“하긴 그래요. 제작자가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 수가 없으니까요.”


“봐봐. 고등어 살을 바르는 것. 이런 단순 작업이라도 살이 잘 발라지면 엄청 기쁘다구. 단순 작업에도 나름의 희열이 있어. 꼭 창작이 대단한 것만도 아냐.”


국장님은 고등어 살을 완벽하게 바른 후, 숟가락은 놓다가 결국에는 분통을 터트리셨다.



세상에! 야니가 뭐니, 야니가.



그러니까 야니가 뭐냐면.


우리가 만든 홍보영상은 작년 홍보영상과 비교했을 때, 정말이지 차원이 다르게 좋았다. 전보다 한 50배는 퀄리티가 좋았다. 감성적인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CF 때깔의 고운 영상과 효과가 조화로웠다. 제작진의 금손으로 탄생한 고퀄리티 영상에 나는 저절로 탄성을 질렀다. 우리끼리는 어깨를 으쓱 할만한 멋진 결과물이었다. 뿌듯했다.  


하지만 우리는 기업 시사회에서 와장창 깨졌다.

전에 우리에게 했던 요구사항을 깡그리 무시한 건 물론, 부장이란 분은 배경음악부터 걸고 넘어졌다.


“야니. Yanni 알아요? 그 사람 음악으로 갑시다. 야니 음악이 참 좋아. 자르지 말고 통째로 넣어요. 그리고 자막에 열정, 도전, 혁신, 미래. 이런 걸 빵빵 넣어달란 말이야. 지금 카피는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막 달리고 날아다니는 것도 고. 우리 회사 최고다! 사기충천할 수 있게 빵빵!”


담당 부장님의 한 마디에, 우리는 영상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건 홍보영상이 아니라 선동영상에 가까웠다. 게다가 퀄리티도 완전 저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업계에선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우린 일부러 코퀄리티 영상을 뜯어 고쳐서 저질 선동영상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우린 을이었다.


정! 전! 혁신! 미래! 빵빵! 영상에 집어 넣기에는 1954년생 음악가 야니(Yanni)의 음악은 너무나 잔잔하고 올했다. 게다가 편집도 하지 말고 음악을 아예 통째로 넣으라니.


하지만 말이 안 되는 일을, 되게 만드는 게 우리의 일이었다. 내일 아침까지 완성하려면 투정 부릴 시간이 없었다. 나는 잽싸게 도전과 혁신을 외치는 뜨거운 작가로 변신했다. 우린 기어코 맘에 안 드는 영상과 카피를 집어 넣었고, 우리의 기준에서 30배쯤 질 떨어지는 영상을 다시 만들었다.


블랙코미디가 아니다. 기업 홍보영상을 만들다 보면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고퀄리티의 영상을 만들어가도 윗분의 취향과 말 한 디로 그냥 까버리고, 가타부타 정확한 지시도 없고, 연락도 없다. 그렇지만 우린 무작정 만들고 수정하고, 만들고 수정해야 하는. 그야말로 갑질 시스템이었다.  


방송판에서 잔뼈가 굵은 국장님은, 그런 창작활동에 회의감을 느끼신 듯했다. 스스로를 단순 작업자로 깎아내려 보지만, 이미 창작자의 자존심에는 스크래치가 죽 그어진 터였다. 


허나 괜한 고등어에 분풀이해봤자 무얼 하나. 일단 먹고 힘내서 또 만들어야지. 돈 벌어야지.


우린 새벽까지 저질 영상을 꾸역꾸역 창작했다. 구성도 완전히 바꿔버렸다. 그래도 영상 하나, 음악 하나, 자막 하나. 장인정신으로 다듬고 붙였다. 완성된 영상에는 야니의 음악이 흘렀다.


영상을 다 만들고 보니 너무 부끄러웠다.

이게 우리 작품이라니.



나는 새벽 택시를 타고 집에 가면서 생각했다.

영화나 CF, 방송을 보면서 사람들은 또 혀를 차겠지. 우리나라는 퀄리티고 수준이고 저것밖에 안 돼. 쯧쯧.


하지만 스크린 뒤에 제작자들에게는 나름의 고이 숨어 있다. 정작 혀를 찰 만큼 낮은 수준을 자랑하는 건 열악한 제작환경과 막무가내 제작 시스템이다.


하지만 어쨌든 업이 먹고 살아야 하니. 스스로 부끄러운 창작활동을 해야만 하는 피디, 작가, 디자이너. 그밖에 모든 창작자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 싶다.


일단은 집에 가서 눈 좀 붙여야겠다. 분명 아침 댓 발부터 엄청난 수정사항이 쏟아질 테니까.


그래도 국장님의 고등어는 예쁘고 완벽했어. 게다가 맛있었지.


나는 피식 웃다가는 꾸벅 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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