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수리 Oct 19. 2015

마더

사이보그 마더

감기약을 먹고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조금 먼 미래에 다녀왔다. 
 

나는 아주 바르고 유능한 남편과 결혼한 여성이었다. 어느 날 그의 아버님이 방문하시기로 했다. 나는 집 안을 깨끗이 청소했다. 


인터폰이 울렸다. ‘도어 오픈’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인터폰이 울렸지만, 그래서 몇 번이나 버튼을 눌렀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인터폰이 고장 난 것 같았다. 화가 나셨으면 어쩌지. 나는 허둥대다가 결국 직접 문을 열어드렸다. 


문 앞에 선 아버님은 예상과는 달리 웃고 계셨다. 아니. 침착하게 미소 짓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아버님이 말했다. 


“이런, 인터폰에 오류가 생긴 모양이다. 마더가 고쳐야겠구나.”


아버님은 열댓 권의 책을 들고 계셨다. <육아의 기술>, <미래의 역사>, <쾌적한 아이 공부법>, <올바른 마더 태도의 이해> 등. 평범하지만 좀 이상한 제목의 책들이었다. 


“지식 섭취 방법은 고전 스타일을 추천한다. 옛날식 종이 교과서 섭취 스타일이 가장 좋아. 일방적이고 효율적이지.”


아버님은 내게 육아와 학습법에 관한 일종의 교과서를 전해주셨다. 이 책들을 일정량 섭취해야만 공인인증 마더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나는 지식에 ‘섭취’라는 표현을 하는 것도, ‘공인인증 마더’라는 개념도 이상했지만, 그냥 고갤 끄덕이고는 말았다. 


꿈속의 조금 먼 미래에서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0세부터 표준유치원에 보내졌다. 엄마들은 약 처방전을 받듯이 교육 처방전을 받고, 약을 먹듯이 처방받은 교육 도서를 읽었다. 그리고 그 매뉴얼에 따라 아이에게 행동하면 되는 것이었다. 아버님은 자상하게 웃었다. 


“이전 세대에 내가 읽었던 책도 몇 권 가져왔다. 아주 유익할 거다.”


꿈속이었지만 그때쯤에서야 내가 아이를 낳을 엄마이거나, 아이를 낳았지만 표준유치원에 보낸 엄마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님, 그런데 아이를 표준 유치원에 보내는 것보단 부모가 직접 키우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아버님은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잠시 후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는 교육기관에서 훨씬 훌륭하게 키울 수 있다. 부모는 아이와의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저는 아이가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도록 함께 살 비비며 살고 싶어요. 아이가 원하는 일을 함께하며 친구 같은 부모가 되고 싶은데요.”

“그렇다면 아이는 안정과 위로를 얻으며 자라겠지.”


“전 제 아이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훌륭한 아이는 되지 못할 거다. 온갖 감정에 휘둘리고, 불쑥 충동적이거나 나쁜 감정이 아이를 지배하기도 할 거다. 최대한 감정은 억제시키고, 매뉴얼을 암기한 훌륭한 아이로 키워야 해. 그래야 자라서 훌륭한 어른이 되고, 국가에 이바지할 수 있단다.”


“충동적이고 나쁜 감정이 정말 나쁜 건가요? 아니, 그런 것에 먼저 ‘나쁘다’라는 말을 붙이고 가르는 것 자체가 나쁜 것 같은 데요. 아버님, 그건 나쁜 감정이 아니라 ‘생각’이라고 하는 거예요.”

“세상에, 그렇게 위험한 말을 함부로 내뱉다니.”
 

아버님은 매우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이래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위험하다는 거다. 나는 네가 무척이나 안타깝구나. 얘야, 마더를 위한 신경정신안정기관이라도 잠시 다녀오겠니?”


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너무도 바르고 유능한 나의 남편과 너무도 침착하고 올바른 아버님은 모두 먼 미래의 교육기관에서 재배됐음을. 나는 다급히 물었다. 


“아버님, 어머님은 어디 가셨나요?”

“마더들의 쓸모와 거처는 이미 알고 있지 않니. 얘야, 아무래도 네게 커다란 오류가 생긴 모양이구나.”


아버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너무나 깔끔하고 안락한, 정돈된 집안에 온기는 없었다. 


“걱정하지 마. 그곳에서 다시 배운다면, 넌 유능한 마더로 리셋될 수 있단다.”


인자하게 웃는 아버님의 얼굴에 소름이 돋았다. 틀림없이 그는 가짜 인간. 사이보그였다. 

진짜 인간은 어디로 간 걸까. 이곳엔 나뿐인 걸까. 무섭고 외로웠다. 밖으로 난 커다란 창문에서 눈 부신 빛이 쏟아졌다. 감정을 억제해야 해. 릴랙스. 릴랙스. 나는 살아남아야 해. 나는 잠시 창문을 바라보며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그리고 침착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 데 성공했다. 


“죄송해요. 제가 잠시 과부하에 걸렸나 봐요. 충전을 해야겠어요. 아버님, 잠시 창문을 열어도 될까요?”

“물론이지.”


나는 빛나는 새하얀 창문으로 다가가면서, 그리고 창문을 열면서. 부디 창밖에는 새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길 기도했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재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